™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사는 게 힘들다고 해서

카잔 2014. 8. 13. 23:46


1.

후배가 아내의 산후 우울증에 대한 고민을 털어왔다. 그와 아내 모두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 셋이서 만났다. 나는 이것저것을 물었고, 그녀는 아이 키우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루 24시간 내내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이야기의 마무리는 다른 분위기로 맺었다. "그래도 좋을 때도 많아요." 힘들다고 말하다 보니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좋을 때가 많은 게 사실이기도 해서 꺼낸 말일 터.


"이해인 수녀님셨나. 이런 말을 하셨어. 사는 게 힘들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행복하다고 해서 힘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네가 그리 말해도 한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마셔." 힘든 게 있으면 더욱 털어놓기를 바라는 마음, 털어놓고서 괜히 후회스러우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꺼낸 말이었다. 내 말이 적절했기를 바란다. 


2.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다, 조인성과 공효진이 남녀 주인공인 드라마로 주제가 흘러갔다. 친구 아내가 농담을 던졌다. "자기야, 오빠 조인성 닮지 않았어?" 후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만히 보면 분위기랑 손짓이랑 뒷모습이 좀 닮았어." 내가 말을 받았다. "수영아, 앞으로 신랑과 의사소통을 위해 조인성 이야기는 그만 해야겠다. 쟤 표정 좀 봐." 유쾌했다. 조인성 언급 때문이 아니라 친밀한 분위기 덕분에.


종종 듣는다. 뒷모습이 참 멋있다고. 12년 전 이야기다. 신입사원인 내게 본부장님이 말씀하셨다. "정말 멋지세요. 얼굴 돌리기 전까지는." 모두들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하나라도 멋져서 다행이라고. 자조가 아니라 객관이다. 남자 인물을 1에서 10까지의 등급으로 나누면, 나는 겨우 7등급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1등급이 연예인 수준이다.) 조인성, 정우성이 부럽지만 내 삶에도 낙과 즐거움이 있다.


오늘 일정이 많았다. 귀가하여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은 큰 낙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의식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채널을 돌리는 사이, 조인성 주연의 그 드라마 엔딩 자막을 보았다. (뭐였더라? 고마워 사랑아, 였던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들 TV를 보며 사는구나. 감각적 즐거움도 삶의 유희지. 나는 지금껏 책만 보며 살았구나.' 내게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묻던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공부하는 재미, 책 읽는 기쁨으로 살았다. 학자나 교수가 된 것은 아니나, 지적 생활을 누리며 배움의 기쁨을 맛본다. 더러는 배운 것을 나누고 전하며 보람도 느낀다. 내가 놓치고 있는 삶의 즐거움도 많겠지? 드라마로 울고 웃는 즐거움, 홍대 클럽에서 신나게 몸을 흔드는 황홀, 벗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우정,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식도락에 빠져드는 행복, 그리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기쁨들.


3.

삶이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공부한다고 사들인 책값이 작은 오피스텔 전세값에  육박하는 것을 보고서, 책을 웬수처럼 느꼈었다. 대신 파텍 필립 칼라트라바 하나를 샀더라면 하는 허황된 생각도 했다. 내게 어울리지도 않을 그러 명품을 구입할 일은 없겠지만, 책값의 얼만큼은 물건을 사들이는 일이 아닌 무언가를 경험하는 일에 썼으면 하는 후회가 든 것은 분명하다.


오늘도 후회스런 날이다. 나의 어떤 행동이 말이다. 나를 잘 따르는 학생과 말다툼을 했다. 후회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움이 내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말을 좀 해 주세요." 오늘 그에게 너댓 번은 들은 말이다. 그는 평소에 내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 답답했단다. 연장자로서 녀석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오늘 나는 과잉 활동, 과잉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모른다. 수용력을 초과하는 영역에선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 법이니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다. 비겁하게 살지 말자. 용기를 내자. 부끄러운 일도 줄여가며 살자. 뫼르소의 정직함으로 살자. 터덜터덜 고단한 귀갓길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말을 떠올려 주시길. 힘들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듯, 고단했지만 즐거운 순간도 많은 내 삶이다.

 

태양은 날마다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