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아늑한 실내. 창문 밖 서쪽 하늘의 석양. 흩날리는 진눈깨비.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재즈. 그리고 한 권의 책! 이 정도면 짜릿한 독서가 이뤄져야 했으리라. 독서의 즐거움에 풍덩 뛰어들어 ‘아, 내 사랑 책이여’ 라고 흥겨워했어야 했다.

 

예상은 종종 빗나가기 마련이고 완벽한 상황에서의 결과도 때론 시원찮은 법! 나는 십오 분 만에 손에서 책을 내려놓았다. 눈동자와 주의력이 동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은 문자를 읽는데 머리가 따로 놀았다. 억지 독서는 억지로 먹는 음식만큼이나 맛없다.

 

부실한 독서의 원인은 둘 중 하나일 터! 책이 시시하거나 독자가 산만했거나. 이번엔 완벽하게 독자 탓이다. 지구상에 시시한 책은 무지막지하게 많지만 내 손에 든 책은 독보적인 명저다. (저자가 몽테뉴 급이라고만 밝힌다.) 게다가 이 책의 앞선 내용에서 나는 끊임없이 전율했다.

 

책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의자 등받이에 엉덩이를 바짝 붙였다. 음악도 잠시 껐다.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나는 이제 책을 읽는다.’ 여러 번 되뇌었다. 기분이 차분해졌고 주의력이 충전됐다. 다시 책을 펼쳤고 한 시간 동안 책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세 가지 교제에 대하여’ 라는 장이 있다. 그가 말하는 세 종류의 친교는 우선 사랑과 우정이다. 몽테뉴는 “아름답고 정직한 여성”과의 교제 그리고 “드물지만 귀중한 우정”을 언급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세 번째는 책과의 친교인데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우리와 가깝다. 앞의 두 가지가 가진 장점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책과의 교제는 꾸준히 그리고 손쉽게 누린다는 장점이 있다.”

 

이 말에 동의하는 나로서는 종종 불만을 터트리는 책의 모습을 상상한다. 연인처럼, 지금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거야? 또는 친구처럼, 너 오늘 너무 대충 입고 나온 거 아냐? 독서는 일종의 친교다. 책읽기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땐 나는 자세와 마음을 가다듬는다. (과장하여 표현하자면) 친구나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그러면 독서력이 회복된다.

때론 형식이 내용을 이끌고

시스템이 마인드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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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종인 역, <신을 구하는 자> The Saviors of God

(카잔차키스 전집 『향연 외』에 수록)

 

1.

강력한 책이다.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비범하기에 그렇다. 감히 선언하자면, 향상심이 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실제적인 고민과 노력을 해 온 이들에겐 위로와 자극 그리고 달려갈 푯대를 선사하리라. 부연 설명 없이 선언과 명제만 나열되어 있기에 모호하게 읽힐 대목이 많지만, 두어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진 않다. 내겐 곱씹어 새길 문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거듭하여 읽고 싶은 책이 됐다. 사실 두 번째로 읽는 중인데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대체 한 번은 읽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2.

<신을 구하는 자>는 카잔차키스(1983~1957)가 1923년에 쓴 책이다. 작가 자신을 위한 책이다. 마흔이 된 카잔차키스는 인생철학을 정리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구상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신을 구하는 자>를 탈고한 직후부터 『오디세이아』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예술로 형상화할 계획을 세웠고 <신을 구하는 자>를 쓰면서 다듬은 생각들을 『돌의 정원』이라는 소설에 흩뿌려 놓았다. (에세이를 통해 생각을 정돈하여 전하고, 소설이라는 예술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카뮈의 작업 방식과 닮았다. 누가 선취했는지는 모르지만.)

 

3.

철학적 에세이와 소설로의 예술화를 병행한 방식이 의미하는 바는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톨스토이나 발자크처럼, 카잔차키스는 유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오직 예술(唯美)’만을 외치지 않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소설가였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사회를 관찰했으며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기 위해 소설이라는 예술을 탐구했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은 유미주의라는 구분이 무의미하다. 작품 자체가 매우 아름다우니까! 다시 말해 놀랍도록 예술적이면서도 유미주의 너머의 가치(종교, 시대, 삶과 인류)를 담고 있으니까.)

 

둘째, <신을 구하는 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해를 돕는 중요한 텍스트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여 둔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카잔차키스도 두 권의 저서를 특별하게 여겼다. 카잔차키스 전문가인 ‘키먼 프라이어’는 이렇게 썼다. “<신을 구하는 자>와 <오디세이아>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지목하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두 작품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기 바랐다.” (키먼 프라이어! <신을 구하는 자> 영역본 번역자다. 한국어판에도 30쪽에 달하는 그의 작품 해설이 실렸는데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요긴한 텍스트다.)

 

4.

『신을 구하는 자』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철학서에 가깝다. 칸트처럼 논리와 체계를 세우는 철학서나 플라톤처럼 대화를 통해 하나의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서는 아니다. 니체처럼 아포리즘으로 구성한 철학적인 선언이다. 이 책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달콤한 사탕을 즐기듯이 문장들을 음미하면 될 것이다. 사탕은 딱딱하다. 입에 넣은 순간엔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혀로 굴리며 조금 빨고 나면 달콤해진다. 깊은 사유를 담은 딱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물고 빨면 달달해진다. 다른 점도 있겠다. 사탕을 오래 빨면 혀가 얼얼해지지만, 일급의 사유들을 오래 음미하면 그윽해진다.

 

5.

<신을 구하는 자>는 프롤로그, 준비, 행진, 환상, 행동, 침묵 이렇게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저자의 전체 메시지를 표현하면 이렇다. “너 안의 향상심을 발견하고 더욱 키워라. 전사처럼 스스로와 투쟁하여 극기하라.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깨달아 행동으로 실현하라. 정신적인 성장도 놓치지 마라. 자기실현의 완성은 침묵이다. 내가 말하는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함이다. 투쟁도 소리칠 필요도 없는 경지!”

 

6.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카잔차키스는 ‘준비’ 장에서 인간의 세 가지 임무를 선언한다. 첫 번째 임무는 운명애(amor fait)다! “쓸데없이 저항하지 않고 마음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 여러 가지 제한을 인정하고 아무 불평 없이 일하는 것 - 이것이 인간의 첫 번째 의무이다. 불안정한 심연 위에다 원만하면서도 환한 마음의 지역을 구축하라. 아주 씩씩하면서도 근면한 자세로 그런 지역을 구축한 다음, 그 지역의 군주처럼 우주를 도리깨질하고 키질하라.”

 

두 번째 임무는 “고뇌 속에서 피를 흘리고 그 고뇌를 심오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중에 오고 또 가장 커다란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이것이 세 번째 임무다.” 삶의 부조리와 허무 그리고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라는 선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당신의 뱃머리를 그 심연 쪽으로 돌려놓으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7.

‘행진’은 네 단계로 이뤄진다. 에고, 종족, 인류 그리고 대지다. 우리의 의식을 에고에서 벗어나 인류와 대지까지 확장시켜 주는 장이다. ‘환상’ 장에서는 향상심을 추종하되 홀로 투쟁하지 말고 동료들과 연대하고 역사적 위인들과 연대하길 권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지의 힘을 얻으라고 권한다.

 

이 모든 선언과 투쟁은 결국 행동하기 위함이리라. “이론의 가장 거룩하고도 궁극적인 형태는 행동이다.” “행동은 구원으로 가는 가장 넓은 문이다.” 여기에서 카잔차키스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한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 중 하나다.

 

카잔차키스에게 ‘신’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이고 때론 보통명사다. “우리는 신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심연, 신비, 신비, 절대 암흑, 절대 광명, 물질, 정신, 절대 희망, 절대 절망, 침묵.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다. 이 이름만이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우리의 가슴을 심오하게 울리는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8.

마지막 단계인 ‘침묵’은 정신적 수련의 최후 단계다. 다다르기 힘든 이상적인 단계. “침묵은 이런 뜻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완수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노력의 최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투쟁할 필요도 소리칠 필요도 없다. 그는 정적 속에서 완벽하게 원숙해졌다. 그는 더 이상 파괴당하지 않는 자, 온 우주와 영원히 함께 있는 자다.” 침묵은 극단의 경지다. “여자의 자궁 속에 안착한 남자의 씨앗”이 느낄법한 편안함! 최선과 최고가 머무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평온(serenity)이랄까. 침묵의 경지는 고정점이 아니다. “그 정상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심연의 위에 매달린 채 자랑스럽고 마법적인 주문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

 

9.

인상 깊었던 대목 하나를 적어 둔다.

 

“나는 물질을 제압하여 그것을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되도록 한다. 나는 식물, 동물, 인간, 신들을 마치 나의 자식인양 좋아한다. 나는 마치 온 우주가 내 몸인 양 내 주위에 깃들도 또 나를 따라 오는 것처럼 느낀다.” (p.189)

 

작품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목인데 처음 읽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시 읽다보니 의미심장했다. 후반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모양새인데 이를 보면 작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책이 아님을 느끼시리라. (카잔차키스라는 작가의 성실함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책들은 마치 현대미술을 대하는 기분을 들게 하지 않던가.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인 거야?’)

 

“너는 전투를 거듭하며 전쟁에 출정한 병사의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 너는 너의 몸이라는 작은 천막에서 싸웠다. 그러나 보라, 그 싸움터는 너무 비좁았다. 너는 숨이 막혔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갔다. 너는 네 종족 위에 천막을 세웠고 너만의 손과 심장이 아니라 종족의 손과 심장이 가세했다. 너는 죽은 조상들을 되살려 피를 보충했고, 그런 다음에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자 모두와 함께 전쟁터로 출발했다. 갑자기 모든 종족이 너와 함께 움직였다. 인간의 성스러운 군대가 너의 배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대지 전체가 군의 진지처럼 진동했다. 너는 까마득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두뇌 속 전투 계획은 계속 가지를 쳐나갔다. 대치하던 모든 원정대는 네 가슴의 은밀한 진지로 합류했다. 너의 배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군대가 싸우는 전선에 보급품을 보내기 위한 보급 부대로 조직되었다. 이제 온 대지가 너에게 매달려, 살의 살이 되고, 저 혼돈으로부터 소리 지른다.” (p.221)

  

10.

인용문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전체 소감을 덧붙임으로 글을 맺는다.

 

1) 먼저 유대 또는 연결에 대하여.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에게만 함몰되면 세상을 잃을 것이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면 그와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리라. 카잔차키스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부터 배우는 자들이야말로 위대함에 이르지 않던가. 니체가 떠오른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 주는 가장 강력한 표지다. 내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이 사람을 보라>)

 

2)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유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되 비유의 언저리를 확대 해석하면 오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우월함이 아니라(전투, 제압, 보급 등의 단어 때문에 하는 말이다) 타자와 자연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가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라고 보긴 했지만 인간 우월주의를 강조하진 않았다. <신을 구하는 자>에서 이리 말하기도 했다. “대지의 목적은 생명이 아니다. 또 인간도 아니다.”

 

3) 이 책은 향상심을 가진 이들을 위한 책이다. 상승은 힘들다. 지금 일어서서 점프를 해 보라. 점프를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이라고 해 두자. 이 욕망은 이내 좌절된다. 중력의 힘에 끌려 이내 땅으로 내려올 테니까. 나에게 점프는 한 인간의 성장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성장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과제가 자기를 넘어서는 일, 다시 말해 극기다. 타자와 연대하고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흡수할 줄 아는 이들이 ‘극기’라는 장기전에서 더 자주 승리하리라.

 

4) ‘낮은 여기’에서 ‘높은 저기’로 오르는 이들에게는 사다리가 필요하다. 의식의 사다리, 인식의 사다리, 열정의 사다리, 실천의 사다리, 의지의 사다리…! 어떤 책은 하나의 사다리다. 누군가의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사다리! 카잔차키스의 <신을 구하는 자>도 그런 책이다. 그렇다면 향상심을 가진 이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가. 세상살이에 ‘반드시’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생과 사 둘 뿐이리라. 하나를 더하자면 사랑의 실천을 끼워 넣고 싶다.) 인간은 책이 없어도 자기를 향상시킬 줄 아는 존재다. 니체는 말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더 이상 없다면 너는 네 자신의 머리를 딛고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5) 사다리 비유를 사유하고 실천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향상심은 자기를 향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 내면, 실력을 높여야지 높이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명성을 향하는 마음이 앞설 수는 있지만, 평생 명성만을 쫓으면 거짓되거나 위험해진다. 세상엔 높이에 비틀거리며 고산병을 치르는 이들이 많다. 높이에 취하여 명성이 곧 자기 존재라고 착각하거나 위선이 탄로나 갑자기 추락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Posted by 보보


아침에 <See you again>을 여러 번 감상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폴 워커를 추모하는 곡이다. 이미 수없이 들었던 노래다. 친구가 그리울 때면 하염없이 듣곤 했다. 가사가 마음을 어루만지면 나는 시공간을 떠난다. 추억에 잠기고, 때론 상상에 빠진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하는 유의 이뤄질 수 없는 상상.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어떤 날엔 뮤직비디오를 시청한다. 마지막 장면이 감동과 위로 그리고 슬픔과 아픔을 안긴다. (때론 마음도 손에 박힌 가시처럼 아프다.) 자신의 승용차에 앉은 두 친구! 따스한 눈빛을 교환하고 주행을 시작한다. 도로는 갈라지고 두 대의 승용차도 다른 길로 들어선다. 카메라는 이제 하나의 승용차만을 쫓아가면서 서서히 줌 아웃된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창가에 섰다. 창밖을 바라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하늘이 나를 이끈 느낌이랄까.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눈물인가 보다. 무심하게 표현한 이유는 내 몸에서 나온 액체라 하기엔 왠지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다짐하고 있었다. ‘상욱아, 구정 때 탈고한 원고를 들고 찾아갈게.’ 웬일일까. 신년의 기운 덕분인가.

 

작년 기일에 녀석의 사진을 보면서, 당분간 안 올 거라고 말했었다. 새로 출간한 책을 들고 오겠다는 다짐이었다. 녀석과의 사별로 삼년을 힘들어했다. 그런 모습은 친구도 바라지 않을 터, 나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잘 살고 싶었다. 친구에게 기쁜 소식도 전하면서 살기를 바랐다. “나, 책 출간했어.” 그나저나, 구정에 간다면 약속을 어기는 걸까?


찾아갈 때가 다가오는가 보다.

구정이든지, 어느 봄날이든지.


덧. 친구야, 너가 떠나고 3년 반이 흘렀다. 잘 지내냐?
(20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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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아한 선동이 더 강렬하다

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 Antoine Compagnon, Un Ete Avec Montaigue

 

1.

이리도 품격 있는 선동이라니! 몽테뉴의 삶과 사상을 40개의 에세이로 풀어낸 책 『인생의 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목표’가 독자들을 몽테뉴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썼다. 1592년에 사망한 몽테뉴는 에세이의 원형인 『수상록』을 남겼다. (인문주의와 개인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상록』을 펼치고 싶었던 순간이 도대체 몇 번일까! 마흔 번에 가까웠으리라. 모든 글을 읽을 때마다 몽테뉴가 궁금해진 셈이다. (수년 전 ‘몽테뉴 스터디’도 했기에 전혀 모르진 않지만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에 『인생의 맛』을 지인에게 추천했는데, 그는『수상록』의 추천 번역본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몽테뉴를 읽고 싶다는 것이다. 『인생의 맛』을 읽은 두 명의 마음이 움직인 셈이다. 이발이중이다. (모수는 적지만) 앙투안 콩파뇽은 독자를 단박에 몽테뉴로 이끈 탁월한 선동가였다. 과장된 동작이나 호기로운 목소리는 없었다. 논리와 통찰 그리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몽테뉴 이야기를 풀어갔을 뿐이었다. ‘선동이 이리도 우아할 수 있구나!’

 

2.

책은 가볍고 작다. 200쪽도 안 된다. 5분이면 읽을 분량의 짧은 글을 40편 묶었다. 편안하게 읽고 몽테뉴가 던지는 화두를 생각하기에 좋다. 1300쪽에 달하는 『수상록』(완역본) 읽기에 비하면 부담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몽테뉴의 저력을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다. 몽테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저자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저자에게 반했는데, 그의 사려 깊음이 단 한 페이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몇 줄짜리 문단을 40여 군데 골라내어 간략하게 해설함으로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손에 걸리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우연에 운명을 맡기면서? 아니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을 빠르게 훑어야 하나? 이 작품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혹은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포기한 채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다루는 데 만족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했다.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가 책을 쓴 방식은 바로 몽테뉴가 글을 썼던 방식이었다. 저자는 『수상록』에 정통했기에 자유롭게 쓰면서도 몽테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몽테뉴를 작은 그릇에 우겨 넣지 않았고 해석과 통찰이 편협하지 않았다. 때때로 라틴어 지식을 동원하여 몽테뉴의 생각을 풀어냈고(‘저울’, ‘성실성’ 등의 글) 몽테뉴 사상의 의의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신세계를 전염시켜 쇠퇴와 몰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닌지” 라고 염려하는 몽테뉴의 글을 두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신세계’라는 글이다).

 

“신세계를 사로잡은 것은 구시대의 정신적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을 무릎꿇린 야만적인 완력이었다. 당시 몽테뉴는 멕시코의 찬란한 문명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스페인의 초기 식민지 개척사를 읽고 난 직후였다. 그는 식민주의를 처음으로 비판한 이들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하워드 진이 떠오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깃든 야만성을 폭로한 그였다. 20대 중반에 그의 『미국 민중사』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웠던 날들! 2016년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개정판이 출간되고 2017년에는 하워드 진 입문서(『만만한 하워드 진』)가 출간될 정도니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함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그는 2010년에 타계했다.)

 

3.

책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먼저 몽테뉴의 말을, 곧이어 저자의 말까지.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시대나 해 단위가 아니라, 매일 매분을 그린다. 내 이야기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금방이라도 내 처지뿐 아니라 생각까지 변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건들과 갈팡질팡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반된 생각들의 기록이다. 나는 또 다른 나 자신일수도 있고, 그때그때 상황과 판단에 따라 주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 『수상록』 제3권 2장

 

“요컨대 인간 조건에 따라 해석하고 그 고난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시계(視界)는 변화에 있지 존재에 있지 않다. 바로 다음 순간, 세상도 나도 변할 것이다. 자신이 한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한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다만 세상 만물이 얼마나 쉼 없이 변하는지를 기술했을 뿐이다. 그는 상대주의자다. 나아가 그의 이 같은 ‘일면’(필자 강조)을 원근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몽테뉴는 말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나의 정체성은 불안정하다. 그는 ‘귀착점’(저자 강조)을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 앙투안 콩파뇽

 

책은 이런 식의 구성이다. 몽테뉴와 후대의 학자가 생각을 주고받는 형식 말이다. 이런 책의 가치는 편집 가공하는 쪽(저자)의 깊이에 달렸을 수밖에 없다. 몽테뉴는 후배의 편집에 반대나 찬성할 수가 없기에 그렇다. 나는 이 책에 만족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편집 해석한 『조르바의 인생 수업』에 큰 불만을 느꼈던 점에 비하면 정말이지 만족이다.)

 

혹시 위 구절에 감동하지 못했다면 나의 개인적 취향으로 고른 구절이기 때문이리라. 상대주의자 몽테뉴는 그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글에서는 몽테뉴의 또 다른 일면들이 소개된다. 회의주의자 몽테뉴, 성실한 몽테뉴, 르네상스인 몽테뉴, 서재인 몽테뉴 등. 니체도 극찬한 이 르네상스의 거장은 매우 진솔하게 자신을 관찰하여 기록했고, 우리 모두는 그의 일면을 통해 자신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몽테뉴 읽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말이다. (‘거의’라는 말의 무책임성은 참 편리하다.)

 

위 본문과 관련되긴 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얘기를 해야겠다. 최근 『역사의 천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벤야민의 생애 마지막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페이지의 여백에 ‘갈팡질팡’이라고 적어야 했다. 벤야민은 종종 우왕좌왕했다. 미국 망명을 두고 고민할 때에도 오늘의 행선지를 결정할 때에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갈팡질팡’이란 워딩으로 기록한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이 반가웠던 이유다. (갈팡질팡이라 해석한 프랑스어 원문이 궁금해진다.)

 

갈팡질팡의 근원은 우유부단함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지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눈앞에 마주한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 마을에서는 진리가 저 마을에서는 오류가 되고, 당시의 진리가 지금에선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푸코는 “나는 달력과 지도가 없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는 지혜란, 이렇게 장소, 상황, 사람을 고려한 종합적이고 시의적인 판단을 뜻한다. 그렇기에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주의자가 된다. ‘지혜’라는 지적이고 감수성 짙은 고지에 이르기 위해 감지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상대주의자!

 

누군가에겐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지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서 우유부단할 확률도 높지만 그들은 점점 용기와 행동력까지 겸비하면서 우유부단함으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우유부단과 지혜는 어떻게 구분할까? (사례 없이 명제로만 언급하자면) ‘순간’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그들의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4.

『인생의 맛』에서 가장 감동했던 글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p.179~182). 나는 자주 내 삶을 성찰한다. 생각과 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종종 이런 고민이 든다. ‘성찰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찰을 줄여야 할까?’ 몽테뉴의 글은 이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추동했다. 성찰을 깊이, 제대로 하라고! 내 삶의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찰의 과다함이 아니라 성찰의 질적 수준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삶을 추동하는 두 바퀴인 성찰과 실천의 균형을 이루지 못함이 문제이지 깊은 성찰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아래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 몽테뉴의 두 구절이다.

 

“내 책을 아무도 읽지 않게 된다면, 내가 그토록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그 많은 시간을 한가로이 보낸 것이 과연 낭비가 되는 것일까? 나라는 거푸집에 이 형상을 찍어내는 동안 나는 자신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시로 다듬고 땜질해야 했으며, 그러는 사이 주인(몽테뉴 자신)도 단단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졌다. 타인을 위해 그리다가 내 본연의 보다 선명한 색으로 내면을 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작가와 한 몸인 책. 고유의 일과. 내 삶의 일부. 이 책은 다른 책들처럼 외부적인 목적과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제2권 18장

 

“내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나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온 것이 시간 낭비였을까? 고작 몇 시간 동안 생각만으로 혹은 몇 마디 말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들은, 긴 세월 동안 성심과 전력을 다해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고 직업으로 삼은 자처럼 깊이 있게 자신을 탐구하지도, 자기 안으로 스며들지도 못한다.” - 몽테뉴

 

5.

책의 원제는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Un Ete Avec Montaigue’이다. 2012년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 저자가 출연하여 몽테뉴와 그의 『수상록』에 대해 5분 남짓 동안 나눈 이야기가 책이 되었다. 이 방송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덕분에 2013년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이후 보들레르, 위고, 마키아벨리, 호메로스까지 진행되었으니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한다. 저자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수업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끝으로 저자를 잠깐 소개해야겠다. 앙투안 콩파뇽!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몽테뉴와 마르셀 프루스트 전문가다. 2013년도 진행된 ‘프로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저명한 프루스트 전문가 여덟 명이 참여했는데 앙투안 콩파뇽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국내 번역된 책은 『인생의 맛』,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공저)과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서평을 맺는다. 나에게 앙투안 콩파뇽이란 학자는 ‘우아한 선동’도 강렬하고 달콤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저술가다.



Posted by 보보

새해 앞에 섰다. 방금 떠오른 2018년 첫 번째 태양을 바라본다. 설렌다. 오늘을 기다린 건 아닌데 반갑기도 하다. 태양이 세상의 동쪽을 비춘다. 건물은 해바라기가 된 마냥 햇빛을 받아 밝아졌다. 나는 환한 마음으로 노트에 새해 소망을 적는다. 하나씩 이뤄갈 때마다 명랑해질 내 인생을 생각하며. ‘2018년은 정말 환상적인 해로 살아보자!’

 

출간. <나는 조르바 학교에 입학했다>

탈고. <리버럴 아츠를 공부하라> 외 한 권

번역. <수잔 손택 평전>

독서. 수잔 손택 全作,『수상록』『포커스』

공부. 인지과학, 예술이론(미진사)

 

여행. 포틀랜드, 펠로폰네소스(그리스), 제주

와우. 와인시음회, STORY 매뉴얼, 유니컨 디너

공간. 아카이브 인테리어 작업, 중고물품 판매

행동. 인터뷰, 팟캐스트, 특강

관계. 가족여행, 블로그 독자의 밤, 와우수업

 

하루를 잘 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한 해를 계획했다. 가족이랑 통화하고 여느 때보다 좀 더 치열하게 운동했다. 오후엔 서쪽 하늘로 저무는 해를 지그시 내다보았다. 태양은 예술가였다. 온 하늘을 주홍빛으로 채색했다. 여의도 너머 서해 바다로 향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도 일상의 예술가가 되고 싶어졌다.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예술가!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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