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

시드니에서 만난 첫번째 인연

카잔 2013. 8. 21. 23:06

 

 

달링 하버를 유람하던 중이었다. 킹 스트리트 워프(wharp) 앞을 지날 때였다. 한 여인이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녀는 끼적이지 않았다. 한 줄 쓰고 생각에 잠기고 또 잠시 후에 뭔가를 끼적이는 식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노트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문장들을 쏟아냈다. 나도 근처에 앉아 뭔가를 쓰고 싶어졌다. 나는 곧 쓸 꺼리가 떨어졌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쓴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갔지만, 나중에는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녀는 작가일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기다렸다. 그녀의 영감이 바닥났나, 할 말이 끝이 났나, 그녀는 아무튼 펜놀림을 멈추고 노트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자리를 뜨기 전에 얼른 곁으로 가서 앉아도 되는지를 물었다. 곧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나는 오래 지켜봤다고, 나는 한국에서 온,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당신도 작가가 아닐까, 하며 생각했었다고 했다. 작가라면, 여행 중에 작가를 만난다는 사실이 뭔가 근사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영어실력 부족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 그럼 무얼 쓴 거냐? / (자신의 가방 속 노트를 가리키며) 이건 내 일기장이다. / 무엇에 대해서 썼는가? 나는 당신이 쓴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 하하하. 그냥 지금의 느낌을 적은 것 뿐이다. 들려줄 게 못 된다.

 

나는 결국 그녀의 단상과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진짜 들을 꺼리가 있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노트를 사진에 담아도 되냐고 묻지 못한 것도 아쉽다. 아마도 필기체 독일어로 쓰였을 테니 크게 부끄러울 것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뮌스터에 살고 있는 독일인이었다. 호주를 여행 중이었고, 아마도 혼자인듯 했다. (혼자인지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5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호주 여행에 대해, 독일에 대해, 니체와 헤세에 대해...

 

엄마는 종종 괴력을 발휘한다. 자신의 자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할 때에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신비로운 일이다. 나도 괴력을 발휘했다. 내 영어 실력으로 그녀와 꽤나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신기한 일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배려하여 정확하게 천천히 말했을 것이고, 어쩌면 나는 스스로의 생각보다는 영어 회화를 잘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자의 이유가 더욱 컸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녀가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물었다. 가도 좋다는 메시지였다. 

 

곧 저녁 시간이 다가올 것이기에 식사를 함께 하자고 청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거절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돈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어차피 식사비는 각자 낼 테고, 거절이란 의사 표현도 반가울 것이다. 청하지 않은 까닭은, 혼자만의 시간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녀 역시 혼자만의 시간을 원할 것이라는 지레 짐작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그녀가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식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모른 채로. 나는 여행 친구와의 즐거운 식사 시간을 놓친 걸까?

 

그녀가 적어준 이메일 주소를 들여다본다. 프뤼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프뤼스가 남자였다면, 아마도 나는 식사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였기에, 오해를 사기 싫다는 마음으로 인해 즐거운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했는지도 모른다.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행친구로는 남자가 더 좋은 걸까? 이런 질문을 두고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여행친구를 다시 만나고, 그가 남자라면 용기를 내어 식사하자고 해야겠다. 이러면 더 이상한가? 혹시 '게이'라고 오해 받는 건 아니겠지?

 

좀 친한 포즈로 찍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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