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의식주 놀이가 시작되다

카잔 2013. 9. 1. 13:16

 

1.

여행 후의 첫날인 31일은 여행 뒷정리를 하며 보냈다. 세탁기만 4번을 돌렸는데, 아직 한 번 더 돌릴 빨랫감이 남았다. 상의 속옷들인데 분량이 적어, 좀 더 모아서 빨래하기 위해서다. 여행 때 입었던 옷이 많진 않으나, 드럼 세탁기가 적은 용량이고, 빨랫감 별로 돌리다 보니 3번을 하게 됐다. 그 중에는 가방 세척도 들어간다. 난 여행 후엔 가방을 세척한다.

 

가방은 먼지와 세균 투성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방을 아무곳에나 놓는다. 비행기내 바닥, 길거리, 상점 바닥, 심지어는 화장실 바닥에 놓는 이들도 있다. 영국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성인 여성의 28%는 화장실 변기보다 자기 가방의 손잡이와 바닥에 묻은 세균이 더 많다. 많은 여성들은 그러한 가방을 침대나 책상 위에 올려놓곤 한다.

 

나는 바닥에 놓을 수 밖에 없는 가방과 항상 메고 다니는 가방을 별도의 공간에 보관한다. 유별나지만, 더러운 먼지와 세균이 생각나서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나의 관심사 중 하나는 이런 유별난 짓을 계속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관대하고 포용적인 인격을 키워갈 수 있을까다. 나는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결벽주의 환자가 더더욱 되고 싶지 않으니까.

 

쓰고 다녔던 모자까지 세척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모자는 드라이크리닝을 하라는데, 그리 하기엔 돈이 아깝다. 모자의 둥근 부분이 망가지지 않게 수건 두어 장을 쑤셔놓고서 말리는 것이 관건이다. 모자를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사진을 하나 찍어 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소지품들이다. 물로 씻을 수가 없는 소지품들을 소독액을 뿌려 닦아내는 일.

 

손의 세균이 잔뜩 묻어 있을 핸드폰, 수첩, 지갑, 볼펜 등을 하나하나 닦았다. 여행지에서 구입한 책들의 표지에도 소독액을 뿌려 닦아냈다. 소독액은 헝겊이 아닌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헝겊은 소독액의 낭비가 심해져 물티슈를 사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닦아내는 길이다. 천으로 된 세면가방은 분사형 소독액을 뿌리면 되고.

 

빨래하고 소독액으로 소지품들을 닦아내는 모습을 글로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건 남자답지 않은 모습인데... 음. 어쩌지?' 쓰고 싶으면 쓴다는 집필지침과 멋진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속 열망 사이의 갈등이다. 결국엔 진솔함을 택할 테지만 갈등은 되었다. 소독과 청결에 대한 이야기는 참아왔는데, 이제 물꼬를 터트리게 됐다.

 

2.

어젠, 양평에도 다녀왔다. 우편함에는 청구서가, 책장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저들도 나를 반기는 걸까? 하나는 돈을 내라는 요청으로, 다른 하나는 얼른 닦아 달라는 애원으로. 요청과 애원이 있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죽고 나면, 누구도 그 무엇도 내게 요청하거나 애원하지 않을 것이다. 요청과 애원, 부담스럽긴 하나, 열렬히 화답하고 싶다.

 

나는 살아있다. 내 한번뿐인 삶에서 부지런히 성숙하고 싶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삶으로 나를 기쁘게 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의미와 유익이 되고 싶다. 이것은 관념 상의 염원이 아니다. 삶의 구체적인 일상과 실제적인 업무에서부터 남다르게 살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빨래, 청소, 납세, 요리, 장보기 등의 일상 모두에서 말이다.

 

3.

귀국하여 오피스텔 엘리베이터를 타니, 전기료 사용요금에 대한 공지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누진요금이 적용된다는 내용이었다. 비싼 '민간 전기' 요금을 고스란히 국민들의 세금으로 돌아갈 거라는 기사도 보았다. (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newsview?newsid=20130830213006514)

 

국가도 제대로 예측을 못하는 일을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모든 사람들, 기관들, 국가들보다 큰 존재다. 예측불허의 존재, 인생! 한달 동안 오피스텔을 비워두었어도 공동 전기요금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 역시 인생이다.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환경오염과 같은 범국가적 문제에 모두가 동참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당연한 것을 두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다. 장마철에 비가 온다고 넋두리 할 순 있겠지만, 세상이 왜 이러냐고 진지하게 불평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겨울이 추운 것도 마찬가지고,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고 이기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생이 예측 불가능한 것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엉터리 결정을 하는 것도,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엉터리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무조건 공동으로 책임을 묻거나 물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나뉘어 접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성으로는 불평하지 말고 '이것이 인생이지' 하며 받아들이고 공감할 줄 알고, 이성으로는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감성과 이성이 모두 활발히 움직일 때, 서로간의 대화도 잘 이뤄질 것이다.

 

귀국 첫날부터, 내가 한국에 왔음을 제대로 느끼게 만든 일들이었다. 청소와 정리정돈, 청구서들 그리고 온 나라가 더워서 전기요금을 걱정할 수 있도 있는 상황들. 이것이 사는 재미다. 박해조 시인 왈, 인생에는 세 가지의 놀이가 있다고 했다. 만남 놀이, 의식주 놀이 그리고 문제해결 놀이. 오늘 언급한 것들은 무슨 놀이일까? 의식주 놀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