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리버럴 아츠

지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카잔 2016. 1. 4. 16:35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찰스 퍼시 스노우의 『두 문화』는 과학의 문화(자연과학)와 전통의 문화(인문,예술) 사이의 간격을 다룬 책입니다. 1959년 5월 7일 스노우는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강연에서 과학자들의 문학, 철학, 예술 경시 풍조가 그들로부터 창조적 상상력을 앗아간다고 지적했습니다. 동시에 인문, 예술에 기반을 둔 지식인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편협한지 역설합니다. 『두 문화』는 이 강연을 엮은 책입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스노우를 읽었습니다. 책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더라도 시간을 할애하여 꼼꼼히 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월의 검증을 버텨냈는지 알고 싶을 때, 책을 누군가에게 소개해야 할 때, 나의 실천을 이끌어내고 싶을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지식적인 '내용'보다 저자가 지닌 학습의 '기술'이나 탐구적 '태도'를 배우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문화』의 주요 내용을 알면서도 2016년에 이 책을 꼼꼼히 다시 읽은 이유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로운 공부를 하겠다는 열망이 우선이었지만, 책을 읽으며 얻은 점이 꽤나 많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것들이 적잖을 겁니다. 실천에 이르지 못한 것들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불가피한 상황이라 여겼던 것은 어쩌면 용기 없음의 결과이고, 실천하지 못한 것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는 것들이 실은 안다는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요. 『두 문화』를 읽으니, ‘과연 내가 자연과학의 힘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한 적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더군요.

 

스노우는 인상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수학자 하디가 스노우에게 말합니다. “지적(intellectual)이란 말이 요즘에 와서 어떻게 쓰이는지 유의해본 적이 있습니까? 러더퍼드, 에딩턴, 디랙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의미 규정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낯선 이름들이 많겠지만, 대화에서 나오는 인물은 모두 저명한 과학자들입니다. 하디를 포함한 네 명 중에서 두 명은 노벨상을 수상했고요. 지적이란 말에 자연과학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제게는,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상기시켜 준 구절입니다.

 

스노우는 역설합니다. “(두 문화는)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p.15) 과학자들은 인문학자들이 과학적 탐구 태도를 모른 채로 가내수공업과 같은 형태로 연구한다고 경시하고, 인문학자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지성의 전부의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스노우는 다양한 사례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학자들의 독서 경향에 대한 스노우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과학자들은 ‘글쎄요, 디킨스를 좀 읽어보려고는 했습니다만’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한다. 그들은 마치 디킨스가 뒤얽히고 쓸모 없는 작품의 작가라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과학자의 디킨스관인 것이다. 디킨스가 문학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 전형으로 탈바꿈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 내가 얻는 결과의 하나였다.”

 

스노우가 만난 인문학자들은 과학자들의 빈약한 인문소양을 자주 지적했나 봅니다. 참다 못한 스노우는 그들 중에 “몇 사람이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노우의 소감을 들어보시죠. “반응은 냉담했고 부정적이었다. 나는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맞먹는 과학의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지성인이 되고 싶은 제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두 문화』를 인문학과 과학의 조화를 다룬 책이라고 주요 내용을 알고 있던 때에는 받지 못한 도전입니다.

 

두 문화의 분리는 학자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스노우의 지적처럼 “우리 실생활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독서 생활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은 대개 자연과학서를 간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의 상황도 다르지 않을 테고요. 두 문화 중 하나에만 속해 있는 독자로서 균형 있는 지성을 추구하고 싶다면, 스노우의 이 얇은 책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입니다.

 

‘두 문화의 조화가 필요하긴 한가?’ 하는 의문이 드실지도 몰라, 스노우의 주장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최고의 지성이 어떻게 탄생하지는 보여주는 명문입니다. “두 문화는 이제 만날 지점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슬프다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사태는 중대하다. 우리는 사상이나 창조의 핵심을 이루는 최상의 기회를 태만 때문에 놓치고 있다. 두 주제, 두 규율, 두 문화의 충돌 지점은 반드시 창조의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정신의 역사에서 어떤 돌파구가 열린 것도 두 문화의 충돌 지점이었다.” (연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