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면서

카잔 2016. 5. 15. 20:37

1.

한국산업인력공단 주최의 <2016년 중소기업 학습조직화 지원사업> 연수를 진행하는 요즘이다. 3월 말부터 교재 개발에 시간을 할애했고, 5월은 경주, 광주, 대전, 서울을 돌면서 워크숍을 진행한다. 교재 개발과 연수 진행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는 피해의식을 맛보지만, 얼마간의 보람과 희열도 느낀다. 특히 어제 끝난 광주 연수의 만족도 점수는 꽤 높았다. 교육에 참가했던 분들의 문자 메시지까지 이어지는 걸 보니, 교육 만족도가 높았음을 실감한다. 3일 간의 수고가 보람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기쁨이요 감사거리다.

 

2.

오전에는 늘 일하는 카페로 나가 다음 주 월요일로 예정된 '리버럴 아츠' 특강을 준비했다. PPT 교안을 만들어 담장자에게 전했다. 내일 진행될 웅진씽크빅 '리더십' 특강에 대한 인지연 설계도 마쳤다. 5월에는 지방 강연이 너무 많아서 집에서 자는 날이 고작 7일 밖에 안 된다. 강연이라는 일은 사전 준비 - 진행 - 사후 팔로업까지 3단계 과업을 안긴다. 서울에 머무는 몇일 동안도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짬을 내어 세탁소에 들렀고, 작업실을 정돈했다. 읽을 책이 있었지만, 독서에 집중하기는 힘들었다. 할 일도 많고, 마음도 어수선했다.

 

3.

늦은 오후, 지하철 역을 나왔다. 익숙한 지역, 낯선 느낌! 갈 곳을 몰라 역 주변을 한참동안 서성였다. '어느 카페로 갈까?' 할 일은 많았지만,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 늘 보다 나은 옵션을 찾는 내게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일할 곳은 많은데, 마음 둘 곳이 없다. 나는 2주 전에 벌어진 일로 괴롭고 힘들다. 나의 불찰도 섞였지만, K의 불찰이 더 크다는 생각에 그가 원망스럽다. 그에게 원망을 전하지는 않았다. K의 상황도 십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에 밉지 않지만, 힘들고 괴롭기에 원망스럽다. 요즘에는, 가만히 있을 때면 무상함과 괴로움이 찾아든다.

 

원통한 면이 있지만, 세월이 진실과 전체를 드러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드러내 주리라 믿는다"고 말하면 더욱 좋을 텐데, 나는 세상이 공평하거나 항상 관대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찾아 보아야겠다. 있다면 힘을 내어 실천해야겠다. 머잖아 힘을 낼 수 있기를, 다시 밝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터널의 끝에 이르러 밝은 세상을 마주할 테지만, 나는 그때까지의 어둠이 두렵다. 빛은 내일의 희망이고, 지금 이 순간에는 어둠이 현실이니까.

 

4.

오늘도 할 일은 태산이나, 약속이 없는 날이다. 하루 종일 강의를 진행하는 날과는 달리, K가 벌여놓은 일들이 자주 생각났다. 일 문제는 힘들지라도 괴롭진 않다. 괴로움은 대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주거나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길 때의 감정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이별할 때를 생각해 보라.) K로 인해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자주 떠오른다. 녀석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거듭 한다. 벤야민이 스페인 국경을 넘어가던 날도 상상한다.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을 때, 여전히 갈 곳 하나는 남는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날에도 책들이 내게 힘을 줄까?' 실험하는 마음으로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은 내 영혼을 살찌우는 장소지만, 오늘은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K는 내게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그의 사과에 마음이 많이 풀렸지만, 나의 힘겨움과 괴로움마저 완화시켜주지는 못했다. 5월 한달 동안 강연이 많다. 시간으로는 100시간이 넘는다. 그나마 묵묵히 일정을 소화하고, 할 일을 해내는 게 다행스럽다. 바빠서 다행인 날들인 걸까? 아니면 바빠서 중요한 질문들을 생각할 기회를 잊고, 가만히 생각해야 할 순간들을 놓치는 건 아닐까.

 

5.

드디어 카페에 앉았다. 할 일들을 했다. 광주에서 만난 강의 인연들에게 보내드릴 자료들을 정리하여 압축 파일로 만들었고, 내일 강의를 위한 의사소통을 마쳤다. 10기 와우들의 피드백 축제를 잠시 격려하며 내 소식을 전했다. 외적인 삶의 모습들이다. 일하는 와중에도 마음 한 켠이 아렸다. 하늘에 구름이 떠다니듯, 마음에는 하루종일 고통이 떠다녔다. '이럴 때 처자식이 있으면 덜 무상할까, 덜 아플까, 조금이라도 삶의 이유를 찾아낼까?' 막연히 대답한다. '처자식으로 이겨낼 고통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고통도 있겠지.' 카페를 나와 힘없이 걷는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적인 삶의 소멸이다.  

 

얼마 전 보았던 뉴스 하나 : 중소기업 사장이 실종됐다! 변호사 등 전문가들은 요즘 그가 잘 나간다고, 그러니 가출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소리없이 웃었다. 사람의 내면은 단순하지 않고, 인생사는 복잡하기 그지 없다. 하루라는 시간에도 웃음과 눈물이 공존할 수 있다. 하물며 인생이랴! 한 사람의 인생에는 실패와 성공이, 희망과 절망이, 기쁨과 슬픔이, 생성과 소멸이 공존한다. 나는 누군가가 삶을 마치기로 결심한 바로 그 날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의 모든 일에 성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았다. 열심히 내일을 준비했고, 글을 조금 썼다. 하루 중 어떤 순간은 고통스러웠고, 어떤 순간은 과업 완료로 잠시 뿌듯했다. 무엇보다 오늘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면서 보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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