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독서가로 자처하려면

카잔 2016. 4. 25. 16:53

정약용은 그를 몹시 존경했다. "문자로 쓰인 모든 학술이, 한번 물으면 모조리 술술 쏟아져 나와 막힘이 없을 뿐 아니라, 각 부분을 전공한 학자처럼 모두 깊이 있게 파악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질문한 사람이 놀라서 귀신이라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는 유학 13경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과학기술서, 의학서까지 능통했다. 『고전산문산책』(안대회 저, 휴머니스트)이 소개한 18세기 조선의 지적 거장, 이가환 선생의 얘기다. 조대구란 사람이 아들을 위해 공부방을 마련하고서 이가환에게 공부에 도움 될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세상에 독서하는 사람은 있지만 독서하는 장소란 없다. 독서하고자 한다면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나 부뚜막 위, 부서진 의자 위, 망가진 담요 위도 모두 책이 쌓여 있는 도서실이다. 반면에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시원한 누각이나 따뜻한 저택, 둥근 연못 옆과 방형의 우물가, 찾아오는 이 없어 빗장 닫아건 집이나, 얼음같이 시원한 대자리와 따뜻한 담요 위가, 곧잘 바둑 두고 술잔치 벌이는 장소기 되기 십상이다. 조대구 군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건만 그래도 독서하는 집을 만든 건 아들 '길증'을 위해서다.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이가환 지음, 안대회 역)

 

이가환 선생의 말에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1) "독서하는 장소란 없다." 책을 읽고자 하는 바람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장소가 주는 영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책읽기를 돕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환경이 따로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사유하며 책을 읽는 이들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어디에서나 책을 읽었다. 세상 곳곳이 내게는 도서관이었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인생에서 독서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세상은 누군가에겐 광장이었다. 독서 장소가 따로 있지 않으니, 독서가 무분별하게 계속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풍광이 아릅답거나 곁에 (독서에 무심한) 사람이 있으면 책을 쳐다보지 않았다. 

 

2) 독서하는 사람들도 여러 유형으로 나뉜다. 재미로 시간을 떼우는 사람, 정보를 얻으려고 읽는 사람, 감동하여 변화하려는 사람! 세 사람이 같은 책을 읽더라도 서로 다른 결실을 얻는다. 책에 대한 기대와 독서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3)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애잔하다. 자식들이 기대를 번번이 져버려 애처롭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을 쏟으니 애틋하다. 이가환도 부모의 마음으로 조대구의 아들에게 권했다. "길증이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무릎이 시리고 눈이 침침해질 지경이거나, 웅얼웅얼 책을 읽어 입술이 바짝 마르더라도, 결코 독서를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 많은 일정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책읽기가 뜸했다. 이가환 선생의 글이 뜨끔하다. 독서하는 장소가 따로 있지 않고, 이동할 때마다 짬을 낸다면 하루 몇 페이지의 책 읽기란 능히 가능할 텐데, 독서에 게을렀던 며칠의 날들이 아쉽다. (나는 삶의 어떤 날들을 어리석거나 나태하게 보내고 나면 아쉬움을 느낀다.) '정신없는 일상은 실제로 바빠서이기도 하겠지만, 책을 읽지 않아서이기도 하겠구나.' 독서로 정신을 되찾고(책 읽기 자체의 유익), 독서를 통해 마음의 여유를 회복해야겠다(책 읽는 시간의 유익). 독서의 힘을 잠시 잊고 지냈다. 가만히 읊조린다. '독서가라 자처하려면 바쁜 일상을 탓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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