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8시, 시티의 야라강 남쪽
1.
오전 8시에 백패커하우스를 나섰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일요일은 백패커하우스에서 무료로 팬케잌을 주는 날이다. 11시에 준다고 했지? 그때까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돌아와야겠다.' 팬케잌을 먹고 싶다기보다 무료로 주는 케잌의 정체에 대한 궁금함이 들었다. 카페로 향하다가 문득, 어젯밤에 세운 오늘의 계획이 떠올랐다.
오전 (피츠로이 정원, 성패트릭 성당, 주의사당) - 중식 (오리엔탈 비스트로) - 오후 (칼턴정원, 멜버른박물관, 브런즈윅 거리) - 저녁 (subway)
이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어젯밤에 동선을 고려해가며 멜버른에서의 남은 일정에 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한 시간이 넘는 작업이었다.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자신의 약점과 습관대로 흘러간다. 하마터면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멜버른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놓칠 뻔 했다. 나는 즉흥적인 기분 대신 나의 소원을 반영하여 신중히 계획한 일정을 따랐다. 오늘을 알차게 보낸 비결이다.
욕망 또한 자신의 여정을 방해할 수 있다. 팬케잌을 먹겠다는 마음으로 숙소에서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려 했던 그 즉흥성은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다. 순간적인 욕망이 내 인생에 불쑥불쑥 개입하는 일은 흔할 것이다. 예방하는 일은 나의 소원과 의무를 잘 고려하여 미리 계획하고 한발짝만 앞서서 앞날을 예상해 보는 것이다.
휴일 오전의 인적 드문 페더레이션 광장
2.
아침식사로는 바나나와 오렌지를 먹었다. 나는 피츠로이 정원을 향하는 플린더스 거리를 걸으며 바나나를 까 먹었다. 껍질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국 같으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기가 곤란했을 텐데(봉지에 넣어 음식물 쓰레기통을 만날 때까지 들고 다녔겠지), 여긴 참 편하다.
처음에는 환영님의 음식물 분리수거가 없어 "편하다"는 말에 음식쓰레기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이 앞서 '편하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는데 막상 내가 일주일 만에 그 편리함을 느끼고 있다. 편한 것은 좋지만, 필요한 수고라면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가치는 쉽고 편함보다는 어려운 대가를 치룸으로 얻어지니까.
참고로, 호주에서는 음식물을 일반쓰레기와 함께 버린다. 분리수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플라스틱과 종이류 등의 재활용 쓰레기통은 따로 있지만, 음식물 쓰레기만큼은 분리하여 버리지 않아도 된다. 호주대사관의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주별로 음식물 분리수거를 시험삼아 시행해 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르겠다.
3.
여행에의 초대
- 샤를 보들레르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
꿈꾸어 보세
거기로 떠나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사랑하다 죽으리
그 뿌연 하늘의
젖은 태양은
나의 마음엔 신비로운 매력
눈물 속에서 반짝이는
알 수 없는 그대 눈동자처럼
19세기 최고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다. 다음과 같이 의역한 것도 있다. "너는 아느냐. 미지의 나라에 대한 향수와 조바심 나는 호기심, 우리들을 비참한 일상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이 열병을."(이진홍) 이유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의 많은 작가들이 여행을 꿈꾸었다. 플로베르가 그랬고, 라마르틴이 그랬다. (언젠가 프랑스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조사해 보자.)
나는 보들레르의 이 시가 싫었다. 여행을 해방구, 도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삶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 보들레르의 시각 끝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떠나라. 해방구를 찾아라. 도망쳐라!" 나의 슬로건은 이것이다. "떠나라. 배워라. 삶을 확장하라!" 내게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삶의 확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