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Rerarding Susan Sontag> 리뷰 (2/2)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 이들끼리의 정서적 공감대가 느껴졌지만(신형철의 책 제목이기도 한 ‘느낌의 공동체’라는 말이 어울렸다), 관객들끼리 활발하게 여담을 나누기에는 형식과 공간이 주는 무게감이 컸다. (콘서트나 상영회에 적합한 의자 배열도 정중한 분위기에 한몫 했으리라.) '관객들과의 대화' 시간은 주로 관객이 질문하고 사회자(사회학자 노명우 교수)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두 권의 손택 책을 옮긴이(김선형 교수)가 간간히 유익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회자와 생각이 다른 일부 독자들은 넌지시 자기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여러 의견이 어우러져 손택 이해에 도움을 준 시간이었다.
나 역시 사회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대목이 많아 마음속으로 대답을 정리했다. (그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벌써 며칠이 지나 그날의 질의응답을 온전히 기억하기 힘들었는데 예스24 웹진 ‘채널예스’ 기사가 있어 도움을 받았다. 아래에 기사를 옮기고, 나의 견해를 덧붙였다. (갈색만 내가 작성했다는 말이다.)
[출처 http://ch.yes24.com/Article/View/28161]
1. 친아버지를 여읜 것이 손택의 성정체성에 미친 영향이 있었는지 궁금하고, 손택은 진실을 집요하게 추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택이 추구한 진실은 어떤 측면에서의 진실이었을까.
김선형 : 손택은 어렸을 때 계부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계부는 교외 주택가에 안주하는 부르주아지로서의 삶을 살았고 손택도 그런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손택의 일기를 보면 지적인 호기심이 없는 안정된 부르주아지의 삶을 경멸하는 것도 나온다. 천재가 사춘기를 겪을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손택이 추구한 삶은 안락한 부르주아지의 것과는 멀다. 성정체성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모르겠다.
노명우 : 진리는 외형적 실체가 있다기보다 사유하는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닐까 싶다. 다큐에 “나는 주류에 저항하는 것이 좋아요, 반대할 수 있는 입장이 좋은 것이죠”라는 말이 나온다. 주류도 변한다. 세월이 흐르고 주류는 바뀔 수 있고, 사회는 끊임없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필요하다. 손택은 그런 행위 즉, 특정 시기의 주류에 반대해서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활동이 지식인 또는 작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이 손택에겐 진리가 아니었을까. 손택이 추구한 진리, 진실은 지식인이 지녀야 하는 입장, 태도에 대한 표명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나 : 성정체성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질문자가 손택의 성정체성로 동성애를 말한 것이라면, 최소한 손택의 경우는 양육(환경적 요인)보다는 본성(유전적 요인)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손택의 십대 시절 일기에는, 어린 소녀가 성정체성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여럿 보이는데, 자기발견과 자기부정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내게는 레즈비언 성향이 있는 것 같다 & 남성과의 육체관계를 위해 정말이지 나는 노력했다.) 손택의 커밍아웃 시기는 여느 동성애자보다 빠른 편이니 시계추가 평생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질문자가 말한 성정체성이 중년 이후의 손택에게서 나타난 여성성의 저하라면, 그것은 유방암을 제거하기 위한 외과 수술 탓도 클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들 데이비드가 수술이 어머니의 여성성을 앗아간 것 같다고 자신의 에세이에 썼다.)
2. 손택이 다큐 말미에 꿈을 이뤘느냐는 질문에 허망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했는데 의외였다.
노명우 : 꿈이라는 것은 이루지 못하니까 꿈이 아닐까. 이룰 수 있는 거라면 계획이지, 꿈이 아니라고들 말한다. 꿈이 이룰 수 없다고 해서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닐까.
나 : 2번 질문은 손택 이해의 중요한 키워드 하나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래의 질문은 이렇다. “Did you fulfill all your desires?" 손택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Certainly not"이라고 답했다. 나는 손택의 표정이 당황과 황당의 복합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뜻밖의 질문이라 당황했고, 답이 뻔하기에 황당했다.
손택은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즐겨했던 작가가 아닌데, 자전적인 모습을 보이는 에세이들은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 투병을 한 손택의 모습이 잠깐씩 등장하나, 인간 손택, 작가 손택의 모습은 『우울한 열정』에서 더욱 많이 발견된다. 데이비드 역시 이 책의 에세이를 두고 “어머니의 자서전을 읽는 듯”하다고 말했다.
자서전 같다는 에세이 중 하나는 카네티를 다룬 <열정의 정신>이다. 손택은 카네티를 찬양한다. 두 사람은 죽음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닮았다. 왜 저항하는가? 삶이 너무나 좋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죽음이 그것을 단절하기 때문이다. 손택의 일기를 보면, 세상의 모든 예술과 문학을 섭렵하겠다는 태도가 깃든 독서목록, 감상목록이 자주 등장한다.
손택은 정열적인 성취자였다. 정열의 성취자들은 전날 아무리 많은 일을 해냈더라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듯 엄청난 열정으로 또 다시 목표, 일, 삶에 덤벼든다. 그러니 손택이 저 대답에 YES라고 대답할 리가 없다. 여전히 그녀에겐 해내고 싶은 일들이 많았으니까. 나는 질문을 받은 손택의 표정을 '허망함'이라고 표현하기는 조심스럽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을 못다했지만, 자신의 성취와 삶을 어이없거나 허무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3. 손택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말하면서 참여를 강조한다. 손택은 유명 작가이나 평범한 장삼이사인 우리는 어떤 ‘참여’가 가능할까?
노명우 : 참여가 정치적인 행동만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손택이 말한 것은 적시된 형태의 참여라기보다 ‘관여’라는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자, 내가 원하는 건 내 삶속에 현존하는 것이다. 지금 삶 속에 자기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말이다... 그게 바로 작가의 일이다.” 손택은 이것을 작가의 의무라고 말했지만 작가가 아니라도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요청되는 덕목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김선형 : 손택이 참여라고 말할 때 ‘앙가주망’(주. 원래는 계약?구속의 뜻으로 사르트르가 자신의 논문에 이 말을 쓰면서 널리 퍼졌는데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가리킨다)이라는 단어를 썼다. 만사를 눈여겨보고 눈을 똑바로 뜬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총체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관점이 필요하고,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관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나 : 손택이 참여를 강조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강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 몰라서다. 손택은 사르트르의 앙가주망과는 다른 모습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손택의 참여는 사회의식에서 출발한 참여가 아니라, 예술을 사랑한 이가 어디까지가 예술의 영역인지를 탐구하다가 사회참여 문제에까지 도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참여의 정해진 형식이나 경로가 있는게 아니라, 자신의 영역에서 사회의식을 발휘하면 된다는 점에서 누구나 사회참여는 가능하다. 글쟁이라면 자기 삶에 관해서만 쓰는게 아니라 시대의 화두를 끌어안고 고민한 글쓰기도 참여고, 가정주부들이 집앞 거리를 청소하거나 분리수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것도 참여다. (나는 이 질문을 듣자마자, 강수택 교수의 ‘시민적 지식인’ 개념이 떠올랐었다.) 누구나 시민적 지식인이 될 수 있다.
4. 다큐는 손택의 사랑, 앎, 병에 대해 주목했다. 삶을 사랑하다보니 손택은 앞서갔고, 똑똑했으며 성적 정체성도 일찍 파악했다. 오만하다고 보일 수도 있으나 아프고 나서 삶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손택에게 있어 질병이 가진 의미가 궁금하다.
노명우 :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대상 자체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경우 아버지가 지난달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고 형이 후두암으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손택은 암 환자에게 보이는 주변의 은유에 주목한다. 형이 후두암 수술을 받으니 주변 사람들은 형의 평소 태도 등에서 문제를 찾아냈다. 암에 안 걸린 것이 신통 했어 혹은 그러니까 그렇잖아, 라고 말하더라. 암을 암 자체로 보지 않고 나를 포함해 은유로서 형의 암을 진단하더라. 암환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주변에서 병 그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은유를 떠올리는 것이다.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고 증상이 나타날 때 나도 ‘거봐, 아버지는 너무 단순하게 낚시만 하시니 치매에 걸리지’라면서 문제를 환원해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병으로 고통 받는 것도 있지만, 은유로서 작용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비만을 비만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게으름의 은유로 보거나 에이즈는 성적 타락함이나 문란함의 은유로 본다. 많은 사람들이 유방암이라고 하면 유방 절제, 여성성 소멸 등을 먼저 떠올린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도 투명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질병을 은유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대상을 투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을 비판했다. 대상을 은유로 보기 때문에 놓치는 문제가 많다. 손택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도달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 : 손택은 암 투병생활 이후 바뀌었는가? 흥미로운 질문이다. 질병은 손택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고, 암 투병을 전후한 삶의 변화를 살피면 손택과 그의 일부 저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손택의 텍스트를 통해 따져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는 손택이 질병으로 인해 바뀐 게 없다고 생각한다. (손택의 평전이나 일기를 보면서 달라졌다고 보일만한 차이를 발견하면, 주저없이 내 생각을 바꿀 것이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로 인해 질병을 생각하기 시작한 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제게 사유할 거리니까요. 생각은 제가 그냥 하는 일의 일환입니다.”(수잔 손택의 말, 25쪽) 이 말 또한 손택의 관심사가 바뀐 것이지 손택 자체가 바뀌었다는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손택이 질병으로부터 얻은 것은 두 권의 책이다. 손택은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으로 생산적인 결과물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두 권의 책 역시 질병의 산물이라고만 말하면 온전하지 못한 설명이다. 만약 손택이 끔찍한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면 항공기를 둘러싼 문제로 에세이를 썼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사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기는 그녀였으니까.
손택은 질병 이후 약해졌는가? 겸손해졌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데이비드에 따르면, 그녀는 낮은 확률을 뒤짚으며 살았다. 그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두 번의 암을 극복한 사실을 통해 손택은 자신의 신념과 여전히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확인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생각도 달라진 면이 있겠지만 그것은 질병 때문이 아니라 연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세 번째 암을 진단받았을 때에도 다시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죽는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로 인해 작품에 대한 유언을 남기지도 못했다고, 아들이 한탄스러운 어조로 썼다. 아프고 나서 삶의 태도가 바뀐 게 있다면,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깊어져서 더욱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역시, 손택이 생의 말년에 놀라운 열정과 체력을 보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그녀의 열정적 삶은 '변화'가 아니라 손택의 소명의식과 성취를 향한 열정의 '강화'로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