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짧은소설 긴여운

합작품

카잔 2015. 8. 17. 11:23

 

[짧은 소설K는 두 권의 좋은 책을 쓴 전문가다. 전문가들의 호평한 책인데도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종종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K에게 연락했다. 자문을 구할 때도 있었고, 책이나 토론 프로그램 출연을 부탁할 때도 있었다. K는 거절했다. 도움 될 말을 할 자신이 없었고, 그런 발언을 할 만큼 세상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방송작가는 K 다음으로 중요한 전문가를 찾았지만 비슷한 이유로 거절당했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지성보다는 센스 있게 말을 잘하는 인사가 방송에 더 적합하지만, 작가와 PD는 자기 프로그램만큼은 말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높은 지성을 소유한 이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그들의 의도는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대중서로 이름을 알린 저자 J를 초대했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방송 녹화가 시작됐다. 아나운서는 J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소개했다. “K를 비롯한 세 명의 전문가가 모두 사양하셔서 오늘 이 자리에 모신 J”라고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두고 기만이라 하기에는 상황이 복합적이다. 면전에 있는 J에 대한 예의, 국민에게 방영되는 방송의 특성, K의 연구 지향적 삶이 하나가 되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J는 대중의 인기를 즐기다보니, 집필을 위해 책을 뒤적였던 짧은 공부와도 점점 멀어졌다. 사람들은 책과 사색의 장소에서 지내는 K보다 미디어 가까이에서 지내는 J의 말만을 들으며 산다. (끝)

 

 

[사족]

 

1)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는 지적 거장이다. 아이는 커가면서 아버지의 지적 세계가 그리 넓지 않음을 깨닫는다. 책을 읽기 시작한 즈음에는 매대에 놓인 베스트셀러 저자와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이 지적 거장으로 보인다. 공부가 깊어지면서 그들의 지적 세계가 깊지 않음을 느낀다. “사유의 가치는 친숙한 것의 연속성과 얼마나 거리를 두고 사유하는 가에 달려 있다.” 아도르노가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한 말이다.

 

2) J의 인기와 명성은 최소한 세 가지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K의 자기불신(겸손이라기보다는 자기 불신에 가까울 것이다), 빈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자의 확신은 가득하지만 그만큼 지성과는 거리가 먼 주장들 그리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성급한 동의.

 

3) 소설 속 K의 공부 지향적 삶 자체를 폄하할 순 없지만, 만약 K가 두문불출하며 공부하는 사이 세상이 K보다 지혜롭지 못한 견해에 흔들린다면 또는 K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나는 K가 세상으로 나아가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불신과 공적 책임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이는 다음과 같이 풀어나갔다. 『격몽요결』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남쪽 바다에 집을 정하고 살려니 학도 한두 사람이 와서 나에게 배우기를 청했다. 나는 그들의 스승이 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한편, 처음 배우는 이들이 방향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확고한 뜻이 없어 그저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묻고 보면 서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도리어 남들의 조롱만 받을까 두렵게 생각되었다. 이에 간략한 책 한 권을 써서 자기 마음을 세우는 것, 몸소 실천할 일, 부모 섬기는 법, 남을 대하는 방법 등을 대략 적고 이것을 <격몽요결>이라 이름했다."

 

4) 생존 철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금도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사회 현안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 과정에서 강경 노선을 폈던 메르켈 독일 총리를 향해 "독일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스스로 유럽의 규율반장을 자처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지적 활동은, 번역되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하버마스 포럼(www.habermasforum.dk)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암울한 시대에는, 비인간적인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학자들의 용기 있는 쓴 소리가 필요하다. ‘지금 여기를 해석하고 변혁하는데 도움을 주는 이론이 아름답다.

 

'™ My Story > 짧은소설 긴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찰과 피드백  (0) 2015.11.03
기만  (0) 2015.08.24
월화수목금금금  (2) 2015.08.11
월화수일금토일  (4) 2015.08.10
경비  (2) 201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