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카잔 2016. 9. 14. 17:16



2008년 개봉작 <걸어도 걸어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대표작이다.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평론가들도 있다. 추석 연휴 첫날, 히로카즈 감독의 세계를 음미하기 위해 홀로 KU시네마테크를 찾았다.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 드라마다. 특히 부모의 자식 사랑과 자식의 부모 사랑 간의 온도차가 크게 다가왔다. 영화는 울림을 주었다. 가슴에 돌맹이 하나를 얹은 마냥 묵직한 먹먹함과 쓸쓸함을 안고 건대 교정을 거닐었다. 하늘은 흐렸다. 바람이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영화의 여운은 내면에 고스란히 쌓였다.


1. 줄거리


15년 전에 죽은 장남의 기일에 온 가족이 모였다. (장남은 물에 빠진 아이 '요시오'를 구하다 목숨을 잃었다.) 제삿상에 모인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큰 딸 가족 그리고 막내아들(차남) 가족이다. 딸네 식구는 저녁을 먹기 전에 떠나고, 막내아들 가족은 하룻밤을 묵는다. 영화는 만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우리네 일상이다.


막내아들 '료타'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어린 아들도 딸린 여자다. 이로써 부모의 걱정을 샀다. 동네의원이셨던 아버지는 료타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료타는 그림을 복원하는 일을 한다. 아버지의 불만을 아는 료타는 아버지와의 대면을 껄끄러워한다.


영화는 고부 간의 갈등을 살짝 보여주기도 하고, 료타 어머니(키키 키린 분)의 가슴 아픈 비밀을 밝히기도 한다. 장남 덕분에 생명을 구한 '요시오'도 찾아온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취직을 못해 당분간 알바로 전전해야 하는 처지다. 너무 뚱뚱하여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집을 나서는 요시오에게 어머니는 "내년에도 꼭 오라"는 부탁을 거듭 한다. 그가 떠나자 아버지가 한탄을 내뱉았다.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준페이가 죽다니!"


2. 영화가 포착한 가족의 일상들


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소소한 사연들과 감정선을, 히로카즈 감독은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이를 테면 어머니(키키 키린)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독설가다. 료타 내외가 오기 전 딸에게 며느리 흉을 본다. "고르고 고르더니 결국 중고"라며 전 남편과 사별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불편을 숨기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인 바람에 얼굴이 달아오른 며느리에겐 "예전 우리 여인들은 술은 받되 잔을 비우지는 않았는데..." 라고 타박한다. 며느리의 서운하면서도 태연하려는, 불쾌하면서도 노력하는 표정까지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말은 그럴듯 하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사위를 꼬집기도 한다. 욕실 타일이 떨어졌다는 료타의 말을, "제가 고쳐 놓고 갈게요"라고 사위가 넉살좋게 받았다. 타일은 모두가 떠날 때까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다. 아들도, 사위도 그냥 떠나 버린 것. 가족이지만, 선 긋기도 분명한 어머니다. 집으로 들어와 살려는 딸네의 바람을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 "사위가 좋은 사람이긴 해도 이 나이에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는 힘들다"는 마음을 내비침으로.


3. 감독의 영화


영화는 잘 알려진 대로, 감독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영화다. ""우리 어머니는 남의 흉을 잘 보는 분이셨습니다. 제3자가 보기엔 우습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했죠. 키키 키린은 독설가로 잘 알려진 배우라, 어머니 역할에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를 제대로 기리고자 하는 감독의 마음이 전해졌다. 24년 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걸 생각하니, 감독이 부러워졌다.


4. 크게 다가온 영화의 메시지


내가 생각한 영화의 핵심은 준페이(와 료타)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회환 그리고 아들의 미지근한 효심이었다. '요시오'가 돌아가고 난 후 료타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는 예상했던 내용임에도 인상 깊었다.


료타 : 이제 내년부터는 요시오더러 오지 말게 하세요.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요.

엄마 : 그래서 오라는 거야. 일년에 한번쯤은 고통스러워야지. 아직 그 사건을 잊기엔 너무 일러.


내겐 엄마의 독설이 아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과 형제를 잃은 심정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형(준페이)의 묘소에 가려 한다는 료타의 말에 한걸음에 따라 나선 어머니였고(흥에 겨워 보일 정도였다), 정작 묘소에 가서는 아들을 향한 그리움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묘의 잡초를 뽑으며 중얼거린다. "자식의 산소를 찾는 것보다 힘겨운 일이 있을까?"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매년 이 길이 힘들어진다면, 차가 없으니 힘들다고 귀엽게 불평하신다.)


장남의 묘소를 찾는 장면에서 나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께서도 큰딸(나의 엄마) 묘소에 갈 때에는 기력이 샘솟는 느낌이다. 돌아올 때의 표정도 한없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묘소에서는 언제나 우신다. 묘봉을 어루만지며 "니가 왜 여기에 있노?"라고 울부짖으신다. 묘는 말이 없다. 곁에서 손자가 소리 없이 울 뿐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딸의 묘소를 60~70회를 찾아갔다(나는 매번 동행했다). 엄마는 동생이 셋 있지만, 내가 알기로 엄마의 형제들이 묘소를 찾은 적은 24년 동안 2~3회에 불과하다. 이모와 삼촌에 대한 원망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저 부모의 고통과 형제의 슬픔이 다름에 깊이 공감할 뿐.


5. "내년 설엔 안 가도 되겠지?"


둘째 날, 할아버지, 료타, 아들이 바닷가를 찾았다. "요즘은 야구 안 보세요?"라는 료타의 물음에 아버지가 답한다. "요즘은 축구를 보지. 기회 되면 같이 갈래?" 아들의 대답이 힘이 없는 데다가 상투적이다. "네. 그래요. 기회 봐서요." 영화는 이제 엔딩 장면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료타 가족(아내와 아들)이 버스를 기다린다. 료타 가족이 버스를 타고 떠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가 말한다. "이제 내년 설이 되어야 오겠지?" (나는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해서 좀 놀랐다.)


카메라는 이내 버스 안의 료타 가족을 보여준다. 료타가 아내에게 던지는 말이 슬펐다. "내년 설엔 안 가도 되겠지?" 부모의 마음과는 너무나 다른 자식의 심정에 공분이 일어나기보다는 공감부터 되었다. 나 또한 효심 적은 자식 같아서 쓸쓸하고 씁쓸했다. 명절을 기회 삼아 여행을 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고향 가족에게 바쁘다고 거짓말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저런 유혹을 느껴본 바 있기에 씁쓸했던 것이리라.  


6.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엔딩 장면


료타의 나레이터가 이어진다. "3년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다투시던 어머니도 쫓아가시듯 돌아가셨다. 결국 축구장에는 가지 못했고, 어머니를 차에 태워드리지도 못했다."


세월이 지났다. 료타 가족은 딸이 태어나 넷이 됐다. 묘소에 찾은 후, 료타 가족은 언덕길을 내려 걸어간다. 그 걸어가는 뒷 모습을 언덕 위에서 롱테이크로 잡았다. 망자들은 떠나고 산 사람들은 걷는다. 카메라를 고정되어 있고, 배우들이 움직인다.


정지 화면은 영화의 여백을 만들어 주었다. 그 여백이 관객을 위한 사유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죽음으로 끝날 때까지 묵묵히 걸어가는 여정이 곧 삶임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가족이 사라지고 난 후 카메라는 도시의 전경과 그 너머로 바다를 보여준다. 정지 화면인가 싶을 때쯤 열차가 도시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고요함 속의 역동적인 열차의 등장이라니! 내게는 우리네 인생에 죽음과 삶이 교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메타포였다.  



7. <태풍이 지나가고>보다 예술적인


'명절에 딱 어울리는 영화구나!' 영화관을 나오면서 든 생각이다. (그래서 이 즈음에 재개봉했나 보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6년 개봉작 <태풍이 지나가고>은 감독이 친절하게 작업했다는 생각도 들었다(대부분의 메시지가 할머니의 발언으로 드러나 있으니까). 반면 <걸어도 걸어도>는 보다 예술적인 영화다. 감독은 단숨에 이해되는 '대사'보다는 영화가 발휘할 수 있는 '예술적 장치(미쟝센, 배우의 표정 연기, 카메라 샷)'를 통해 말한다.

히로카즈 감독의 섬세하고 느린 호흡을 따라간다면, <걸어도 걸어도>는 감동을 얻을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그런 이들이 많지는 않은가 보다. 예매율 1위 <밀정>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관객수였다. 7년 전의 개봉작을 이번 8월 4일 재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관이 극소수다. 15일엔 전국 어디에서도 상영되지 않는다. 16일엔 전국에서 유일하게 부산 영화의 전당, 17일엔 서울 KU 시네마테크에서만 상영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