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다시, 행복유통업자 되기!

카잔 2016. 11. 10. 23:28

서른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운전 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날의 통화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주로 농담조로 이뤄지는 우리의 통화인데, 그 날 친구의 목소리는 유난히 차분했습니다. 친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일단은 너만 알고 있어라. 내가 몸이 많이 안 좋네. 나도 이겨내려고 노력할 텐데…… 암일 수도 있단다.” “병원에서는 뭐래?” 친구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화를 내면서 다그쳤습니다. 한참 후에나 대답을 들었죠. “췌장암일 가능성이 있다는데, 정확한 건 큰 병원에 가야 알 수 있다네.”

 

1990년부터 이십 오년 동안 우정을 이어온 절친한 친구가 췌장암일 수도 있다는 말은 나를 충격에 몰아넣었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서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22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학교 수업 도중에 엄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 동생과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내면서 엄마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던 날이 떠오른 겁니다. 그 때의 절절함으로 친구의 몸에 찾아온 종양이 제발 암이 아니기를 기도했지요. 인생은 때때로 가혹합니다. 간절한 바람에도 “NO”라는 선언을 내리곤 하니까요.

 

정밀 진단을 받은 결과, 친구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난 보름 후에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죠. 지난한 항암 치료가 시작됐고요. 친구는 치료를 받을 때마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친구의 친형이 동행했고, 서울에 올 때마다 나도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첫 번째 항암제였던 젬스타빈은 별반 도움이 못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암제를 바꿀 때마다 친구는 희망과 기운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Rebirth! 다시 일어서리라.” 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입니다.

 

투병 생활을 시작한지 8개월이 되어갈 무렵,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휴양도 하고 가족과 시간도 보내려는 생각이었죠. 여행은 무산되었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병원에 입원했거든요. 며칠 입원으로 몸을 추스르고 퇴원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러던 차에 친구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와우팀원을 만나던 중이었죠. “오빠, 저 이제 어떡해요? 의사가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래요. 한 달 정도 남았다고 하네요.” 머릿속의 세포가 모두 빠져나와 아득히 먼 곳으로 달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신이 아찔했죠. 그날부터 매일 친구의 병원에 갔습니다.

 

날마다 병원에 가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강연이 있는 날에는 두어 시간을 머물렀고 일정이 없는 날에는 일곱 여덟 시간을 보냈죠. 친구는 진통제를 맞아야 겨우 몇 시간 깨어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진통제를 맞으면 많은 시간을 잠에 취해 보내야 하고, 맞지 않으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친구가 깨어나면 잠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친구의 얼굴은 야위어 갔습니다. 한 번은 내일을 기약하며 병원을 나서려는데, 친구가 “잠깐만” 하고 나를 불러 세우더군요. 그가 슬로우 모션으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침상 곁에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일어나 앉더니, 기름지고 헝크러진 머리를 매만졌습니다.

 

“매일 아픈 모습만 보였는데, 오늘은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 어색한 양반 다리로 침대에 앉아,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얼굴에는 고통을 참는 표정이 스쳐갔습니다.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습니다. 웬일이라는 투로 친구의 아내가 농담을 건넸고, 나 역시 “와! 매일 이렇게 인사하면 좋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우리의 말에 고마움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이렇게 앉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섭섭함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후, 병실에서 친구와 단 둘이 있을 때였습니다. 친구가 심각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어젯밤에는 아픈 게 좀 다르더라. 지금까지와는 분명히 다르게 아팠어. 아무리 못 살아도 2년이나 최소한 6개월은 더 살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이번 주가 마지막일까 봐 겁난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맺었습니다. 나의 모든 감각과 지혜를 동원하여 그를 공감하는 동시에 희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괜찮다, 아직은 아니야’ 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거야’라는 진심을 전해주려고 애썼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지금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물었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의 가족들이지.”

 

당시의 내가 할 일은 가슴 속에 존재하는 깊은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혹시라도 맞이할지 모를 이별의 순간을 준비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는 그에게 가까스로 말을 꺼냈습니다. “친구야,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인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잖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거 알지?” 그는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어찌될지 모르니 준비도 해야 하는 것도 알잖아. 내 의견 하나를 전할 텐데, 듣고 니 생각을 말해 줄래?” 친구는 꼬박꼬박 고개로 끄덕여 주었습니다. “소영이, 진영이를 위해 동영상을 찍는 건 어때? 나는 세월이 지나니깐 엄마랑 마지막 인사를 못한 것도 아쉽고 목소리나 얼굴 표정이 가물가물해지더라.”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잠시 동안 울고 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알겠다, 고맙다.”

 

다시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친구는 오스피스 병원으로 옮겼고, 면회를 갈 때마다 옆 병상에 계시던 어르신이 자리를 비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았고요. 생각해 보면, 뜨거운 여름이었을 텐데 날씨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어느 날, 친구가 마지막 숨을 힘겹게 몰아쉬는 모습을 보아야 했을 뿐입니다. 친구는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과 제가 지켜보고 있었음을 인식하면서 눈을 감았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만 25시간 전에 의식을 잃은 후,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뜨거나 의식이 돌아온 기척은 없었으니까요.

 

삼일장을 치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한 달 동안 드나들던 병원 생활은 끝났지만, 슬픔과 고통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 증상이 찾아왔던 것도 같습니다. 삶은 무의미했고, 하루하루가 무서웠습니다.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기가 겁이 나기도 했죠. 현관문을 닫으며 ‘오늘 내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녀석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과 무의미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습니다. 긴 슬픔과 고통이 시작되었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방향도 잃었고요.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수준으로 몇 달을 보냈습니다.

 

20대의 나는 직업적 정체성을 ‘행복유통업자’라고 생각했지만, 친구와의 사별은 나의 정체성마저 바꾸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의 그 낭만적인 직함을 지웠습니다. 내 삶에는 누군가에게 유통할 행복이 없다고 느껴졌고, 모든 사람들의 곁에 존재하는 행복을 발견하려는 의욕도 없어졌으니까요. ‘불행예방업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훨씬 삶의 진실에 가까워 보였죠. 내 인생에 행복이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불행을 다시 경험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가끔씩 누군가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할 때면 이러한 심경 변화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녀석이 세상을 떠난 후의 명절은 잿빛이 되었고, 고향 가는 길은 눈물겨운 생각들이 동행합니다. 명절이면 할아버지 제사상에서 밥을 먹은 뒤, 두 곳의 산소에 갑니다. 엄마의 묘에 들렀다가 친구의 납골당을 향할 때면 ‘나는 이제 삼십 대 후반인데…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친구의 사진을 보고 나올 때면 마음이 슬퍼지고 인생이 무상해지지요. 엄마와의 사별로부터 헤어 나온 시기가 언제인지 가늠해 보기도 하고(이건 긍정의 에너지입니다), 친구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놓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평생 함께 할 줄로 생각했던 녀석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을 직격하면, 마음은 온통 쑥대밭이 됩니다.

 

친구는 너무 빨리 떠났습니다. 가족 같은 친구였죠. 그와의 우정은 에로틱을 뺀 사랑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엔 일 년에 330~40여일을 만났고, 같은 대학교에서 진학하여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습니다.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복수 전공을 선택했지요.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밤에 만나서 자정을 넘겨가며 술잔을 기울이며 희망찬 인생을 꿈꾸었고, 하루의 노고를 서로 격려했습니다. 그가 떠난 슬픔은 여전합니다. 친구는 나의 슬픔을 보며 얼마간 위로를 받겠지만, 내가 영원히 슬퍼하길 바라진 않을 겁니다. 친구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상황을 뒤바꾸어 생각하면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고 내가 떠나야 했다면,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상욱아, 너와 함께 젊은 날들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고, 너처럼 멋진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서로에게 진실한 우정이었는데 너무 빨리 떠나서 미안하다.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는데……. 친구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 주어 고맙다. 아픔을 만져 주어 고맙다. 울고 싶은 날이면 울면서 나를 기억해 주렴. 하지만 이튿날에는 슬픔을 잊고 열심히 네 인생을 살아주길 바란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정을 다해 행복을 누리고 네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그 날, 우리의 우정처럼 삶도 아름다웠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한다. 친구야, 진하게 고맙고 정말 미안하다. 나 같은 우정을 다시 만나기를 바래. 나는 바람 되어 구름 되어 세상도 떠돌고 네 삶도 지켜줄게. 친구야, 안녕!”

 

나를 향한 친구의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길었던 슬픔과 우울을 거두고 다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떠난 후 2년 4개월 동안의 허망하고 무기력했던 날들을 친구가 분명 좋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찌하여 이제야 깨닫는 걸까요? 휴우.) 나는 다시 행복유통업자가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삶의 무자비한 면을 생각하면 이러한 결심이 순진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지만, 수많은 현자들이 희망과 도전과 행복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추구하라고 권고한 이유가 있겠지요. 문득 내 인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슬픔, 무기력, 나태함 속에서 수많은 날들을 보냈으니까요. 오늘밤엔 나의 인생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약속합니다.

 

“친구야, 평생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내가 너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만남을 이어가는 거야. 비록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손을 맞잡고 악수도 할 수 없지만, 내가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영혼의 교감을 이어갈 수 있어. 친구야, 사랑해! 나, 예전처럼 잘 살아갈게. 너에게 전화해서 ‘상욱아, 우리 한 번 뿐인 인생 잘 살아보자” 하면서 서로를 격려했던 순간들이 눈물 나게 그립지만, 그럴수록 더 힘을 내어 우리가 쌓았던 우정에 걸맞은 삶을 살게. 친구야, 네가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선 아프지 않고 평온하리라 믿는다.”

 

*


일생에 적어도 한 두 번은 삶의 심술을 만납니다. 인생이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거죠. 우리의 행복이 전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더 행복해질 가능성, 더 강인해질 가능성, 더 평온해질 가능성! 물론 더 악화될 가능성도 남아 있지요. 우리는 나아질 가능성을 선택해야 합니다. 악화될 가능성을 두고 절망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양쪽 모두 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장을 갈망해야 합니다. 언덕에 오르는 자동차를 상상해 보세요. 기어는 중립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올라갈 가능성과 뒤로 밀려난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어느 정도 아물고 상처와 화해를 하고 난 후에는 힘차게 엑셀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겁니다. 가파른 삶의 언덕을 만나더라도 절망하고 슬픔에 빠지는 대신, 자신의 영혼과 온 몸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언덕에 올라 새로운 풍광을 바라볼 날을 기대하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프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나는 그리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태양은 떠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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