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뷰

카잔 2017. 1. 28. 04:17

1.

예술은 내게 위로자요, 때로는 눈 밝은 안내자다. 망각했던 것들을 일깨워 삶의 모양이나 방향을 제안한다. 추구할 만한 가치와 달려갈 푯대를 보여주어 나를 추동한다. 그러한 일급의 예술을 보았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

영화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힘겨운 삶 그리고 그들을 섬세하게 돕지 못하는 관료조직의 고루한 위선을 보여준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예순 살 정도의 목수다. 성실하게 살아왔고, 자신에게 떳떳했다.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심장병이 악화되어 일을 그만두게 됐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야 하지만 복잡한 절차가 번번이 그를 가로 막았다. 컴맹, 넷맹인 그에게 정부 기관들은 사전 신청을 하지 않았음을 타박한다.

 

블레이크는 절망의 순간에 우연히 자신보다 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케이티를 만났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에게 희망과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블레이크에겐 자녀가 없다. 자녀를 낳았다면 케이티와 비슷한 연배의 딸이 있었으리라. 둘의 관계가 때때로 부녀지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블레이크는 조건 없이 케이티를 지원한다. 어느 날 케이티가 말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할 거예요.” 새 삶을 꿈꾸는 그녀에게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응원하겠소.”

 

3.

케이티는 런던에서 집세가 없어 뉴캐슬로 쫓겨왔다. 새로 얻은 집은 허름하다. 전기를 들일 돈도 없다. 어두워지면 촛불로 실내를 밝혀야 했다. 블레이크는 슬쩍 전기요금을 두고 갔다. 어느 날, 케이티는 욕실 벽을 청소했다. 타일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사실 집 안 구석구석이 보수와 수리를 요구했다. 떨어진 타일을 들고 욕실을 나올 때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했다. ‘울지 마, 케이티! 다시 씩씩하게 일을 시작하고 구직을 위해 노력하면 돼.’

 

그때 딸 아이가 타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엄마에게 왔다. 엄마를 걱정하는 아이. 딸을 사랑하는 엄마. “내일 아침, 기분 좋게 목욕하게 해 주고 싶어. 먼저 자. 엄마도 곧 따라가서 잘게.” 아이가 돌아가자, 결국 케이티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내 가슴도 먹먹해졌다.

 

4.

케이티와 다섯 살,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의 두 아이 그리고 블레이크. 이들은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번은 무료 식료품 보급소에 함께 갔다. (케이티는 보급소를 이용할 자격이 있을 만큼 가난했다.) 점잖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받아들던 케이티는 갑자기 캔 하나를 따서 음식을 짐승처럼 입에다 넣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도둑질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정신을 차린 케이티. “죄송해요. 너무 배가 고팠어요.”

 

기다리고 있던 블레이크가 달려와 그녀를 다독였다. “부끄러워할 거 없어. 자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한 마디의 질책도 없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울고 말았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리 이성을 잃을까?’ 앞선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5.

블레이크가 변기도 고쳐주고 전기요금도 보태주어 고마웠던 케이티였다. 그 날도 블레이크는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 먹고 가세요.” 아이 둘에게 식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블레이크에게도 접시가 돌아갔지만 케이티는 사과 하나를 먹을 뿐이었다. 블레이크가 눈치를 챘다. “자네가 먹어. 난 괜찮아.” 식탁에 앉으며 케이티가 대답했다. “제 최소한의 성의예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말없이 음식을 먹어 준 블레이크가, 나는 정말 고마웠다.

 

6.

몇 주가 흘렀다. 그 동안 블레이크는 보조금을 받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고, 케이티 역시 일자리를 찾으러 다녔다. 그녀에게 검은 손이 뻗쳤다. 한 남자가 매춘을 소개한 것이다. 케이티는 딸 아이의 떨어진 신발도 사주지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위험한 세계에 발을 들이고 만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블레이크가 업소에 가서 케이티를 만난다. “이런 일까지 하지 않아도 돼.” “제발 가 주세요.” 갈등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관객인 나로서도 긴장이 고조되었다. 블레이크의 선의와 케이티의 자존심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타협을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려는 블레이크도 이해되었고, 마트에서 여성용 패드를 훔치기까지 전락한 자신의 삶을 구원하려는 케이티도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인 갈등도 이해되었다.

 

그것은 반목이 아니었다. 갈등은 때때로 애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모든 갈등이 애정일 수 없고, 갈등이 항상 애정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애정이 없으면 대체로 갈등도 없다. 친구와 이 장면에 대해 얘길 나눴다. 영화의 전개와 블레이크의 캐릭터 상으로 보면, 어쩔 수 없이 빚어진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벗어나와 지혜로운 행동으로 따져 보았다. 우리는 블레이크가 모른 척 했어야 했고, 적어도 그 업소가 아닌 다른 상황에서 넌지시 당부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7.

영화가 진행되는 곳곳에서 이 시대의 고질적인 문제를 절감했다. 정부는 매년 새로운 약속을 하지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실업’ 말이다. 내가 알기로, 아직까지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시간을 내어 ‘실업’이라는 21세기의 재앙에 관해 조사하고 좋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전했고 도우려고 애썼다. 그는 현실적 문제를 무시하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오지랖 넓은 낭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의로움과 자존감을 추구하는, 하지만 가난한 시민이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는 보조금 지급 상담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끝내 자존심을 읽고 말았던 계기와 자존심을 잃고 난 이후의 결말에 대한 언급은 영화를 감상하실 분들을 위해 삼가겠다.

 

이 영화는 관람할 때에나 보고 나서나, 가슴이 아팠다. 분명 슬프고 아픈데도 영감과 감동을 얻었으니 행복감도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이라니! 시종 잔잔하고 섬세하게, 세상의 어두운 한편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어떤 이는 고통을 겪으며 '고통 앞에선 모두가 하나'라는 연대의식을 회복한다. 눈물로도 내일을 그린다. 내가 그렇다. 한동안 뜸했던 재능 십일조 강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고작 1월인데, 2017년에 본 최고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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