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2010. 3. 19  요한복음 20:1~10

신약성경의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묘사한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녀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끝까지 곁을 지킨 신실한 제자였다.)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옮기워진 것을 보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한 제자와 베드로가 달려오고, 먼저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제자도 따랐다.
그들은 빈 무덤과 잘 개켜진 수건, 그리고 한쪽에 놓여진 세마포를 확인하고 떠난다.

오늘 묵상한 말씀의 줄거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시신을 옮겨 갔을 것이라 생각했던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무덤 안에 그대로 있음을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 정황을 보고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어떤 이들은 이 상황을 제자들의 믿음 없음, 혹은 얼핏 보고 아무렇게나 믿었다고 해석했다.
나는 그러한 해석이 상황으로의 몰입이 조금 결여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몰래 카메라를 당한 경험이 있다면
몰래 카메라를 지켜보는 것과 실제로 당하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알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은 '어떻게 저걸 모를까? 저 정도면 알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것으로 종합적인 상황 판단을 하여 눈치채기는 힘들다.
우리가 늘 상황을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지는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제자들의 상황을 한 번 더 상상해 보며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어떻게 저걸 보고도 부활을 모를 수 있어?' 라는 해석과 함께
사람이 늘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을 분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님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자면, 제자들을 믿음이 없었다고 보는 해석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한 사람의 형편을 고려치 못했거나
몰래 카메라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견해에 가깝다는 말이다.

오늘 말씀에서 내가 받은 은혜는 '막달라 마리아 제자'의 연대의식이다.
비록 상황 판단이 정확하지는 못했지만 저들은 상황을 서로 전했고, 함께 움직였다.
한 사람이 소식을 전했고, 소식을 전해 들은 두 명의 제자들은 달려갔다.
기독교는 외톨이 신앙이 아니다. 공동체성은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이다.
삼위가 하나되신 하나님에게서도 공동체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 사랑과 공동체 섬김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적 고민과 거룩한 비전을 동역자에게도, 리더에게도 나누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 경향이 짙어졌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함께 움직이는
3명의 제자들을 보면서 나의 영적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간 나는 소중한 기도제목을 친구에게 나눈지도 꽤 오래 되었고
인생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영적 우정과 상의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함께 움직이는 제자들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은혜였다.

(2절)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4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6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10절)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적용>
- 4월의 기도제목 나누기 : 주동, 건수, 그리고 와우팀원.
- 승현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 독서 <에베소서>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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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나는...
내 삶의 여정마다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고 싶다.
그 과실에 기뻐하며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 열매는 달콤하여 금방 질리는 맛이기보다는,
은은한 향기와 함께 담백한 맛에다가 영양이 듬뿍 담긴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 강연이 그랬으면 좋겠다.
한 순간 뜨거운 열정만 안겨주었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실속없는 강연이 아니라,
강연을 듣는 그 날보다, 다음 날에 더욱 살 맛 나게 만드는 그런 강연을 하고 싶다.
사람들이 '우와~! 저 강사 참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강연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우와~! 나에게 엄청난 잠재력이 있구나. 난 대단한 사람이었어.'
라고 생각하게 하는 강연을 하고 싶다.

내 삶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희망, 용기, 열정, 성실, 사랑, 정의, 믿음, 신뢰, 눈물, 나눔 등의 가치가
내 삶에 주렁주렁 주렁주렁 맺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오늘 큐티를 하면서 이토록 소망하는 열매가
내 삶에서는 맺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방법 방법밖에 없다.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좋은 나무인가?
아니다.
지금 내 삶에는 가식과 위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을 하지만, 정작 나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내 안에는 탐욕과 정욕이 가득한 것이다.

오늘 큐티를 통해
일은 능력있게 하지만, 삶의 열매가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
언행이 일치해야 좋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은 듣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열매를 보면 된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좋은 나무가 되는 법이 뭘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그 비결이 바로 다음 절부터 나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천국에 들어갈 만한 나무는 분명 좋은 나무이리라.
그렇다면 좋은 나무가 되는 비결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곧이어 또 나온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나는 말씀을 행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생각하면
한없이 괴로워진다. 무척이나 후회스럽다.

오늘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한동안은 죄책감에 잠겨 있을 뻔했다.

요한이 들려주는 약속의 말씀이 위로가 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개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이 말씀의 원문 시제는 나의 죄가 그 때 한 번 씻겨진게 아니라,
지금도 "씻겨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맥스 루카도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표현으로 선포했다.

"우리는 언제나 씻겨짐을 받고 있다.
씻겨짐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실상이다.
성도의 영혼에 흙먼지가 묻는다. 씻겨진다.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 오물이 떨어진다. 씻겨진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들의 발을 씻고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을 씻어 주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백성을 깨끗케 하신다.
예수님은 꿇어앉아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행위들을 들여다보신다.
그러나 놀라 뒷걸음질치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만 좋다면 내가 씻어주마"
그리고는 그 은혜의 대야에서 자비를 한 웅큼 퍼올려 우리 죄를 씻으신다."


아!
그 때 한 번이 아니라, 지금도 나의 죄를 씻어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분의 그 지극한 사랑에 한없이 감격하게 된다.

어제까지 지은 죄를 회개한다.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면 회개 역시,
그 때 한 번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회개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회개는 과거의 다짐이 아니라, 현재의 실상이요 삶의 태도다.

죄된 삶에서 빛된 삶으로 완전히 돌이킨 삶,
다시 말해 회개의 삶으로 예수님의 현재진행형 용서와 사랑에 보답해야겠다.
보답하는 삶 역시, 과거완료형 회개의 삶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회개의 삶이 되어야 하리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
현재진행형 회개의 삶
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확실한 길이다.

[적용]

1. 오늘 당장 회개 기도하고, 최근 범했던 죄의 목록 적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2. 오늘까지 하기로 한 약속 모두 이행하기, 불가능하면 전화 드려 양해 구하기

Posted by 보보


고린도전서 15:1~11
하나님을 향한 수고로 하루를 채우자!

2절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말씀을 굳게 붙들고 제대로 믿고 있는가?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접하는 손과 복음을 전하는 발을 가졌는가?
도덕적, 정신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는가?

하나님의 빛을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인지 알게 된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나의 심각한 죄도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숨길 곳이 없다.
오늘 아침은 헛되이 믿는다는 말에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된다.

10절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의 감당치 못할 은혜로 인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쁠 즈음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큰 은혜를 주신 것일까?'
이것은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묵상케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계획하심에 동참한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명으로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다.
이 동참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따라야 한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는 신실함의 고백,
"그 모든 수고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는 겸손함의 고백!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주님을 위한 수고와 헌신하는 것에 관심을 갖자.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고로 하루를 채울 때는 감격과 기쁨이 넘친다. 이 기쁨을 기억하자.
최고, 최대를 향한 목표는 달성했을 때에 공허하고 깊은 기쁨가 없다.
영원과 의미를 향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자.

[적용]
1. 하인들을 위한 수고 : 메일보내기, 성경공부 준비하기, 모임 위한 기도하기
2. '주님의 영웅들'에게 기도제목 메일 보내기
3. 현규와 정환에게 편지쓰기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나 같이 연약한 죄인이 어찌 강연을 한단 말인가?
내가 어찌 믿음의 사람들 앞에서 전한 말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오직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는 깨끗치 못한 그릇까지 털어내어 사용하시는가?
그렇다면 내가 깨끗한 그릇이 되면 얼마나 즐겨 쓰시게 될까?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