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어떤 고민은 생존을 위협한다

카잔 2014. 9. 25. 12:04

 

1.

고민의 종류는 두 가지다. 생활을 위한 고민과 생존을 위한 고민! 생활 고민이라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모든 고민은 저마다의 크기로 힘들고 괴롭다), 생존 고민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그래서 생활 고민은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적응(?)하여 사는 이들도 있다. 만성 고민이 되는 것이다.

 

생존 고민은 만성이 없다. 그리 되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병 (<인간중독>에서 송승헌의 연기한 대령을 보라. 어디 그런 고민을 안은 채로 살 수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 후에 오는 감정 등은 도저히 만성이 될 수 없다. 생존을 위한 고민은... 그래서 고통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생존 고민은 말 그대로 생존을 고민하거나 근원적인 것들을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고통, 상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너무 허망한데,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2.

오늘로 나흘째다. 노트북 SSD에 문제가 생겼고, 저장되어 있던 자료가 모두 날아갔다.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나는 3년 9개월 4일 전에 같은 사고를 겪었다.) 문제는 분명 나에게 있다. 원인 진단은 중요하다. 사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마음 정리를 하는 데에도.

 

원인은 복잡하지 않다. 두 가지 뿐이다. 완벽주의 & 안전 불감증.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백업을 하지 않았냐고. 그럼 나는 또 장광설을 늘어놓든지 아니면 그저 웃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장광설이라 함은, 나의 완벽주의 성향에 대한 설명을 말한다.

 

지금 사용하는 노트북은 구입한 지 일년이 채 안 됐다. 기존 하드디스크보다 강한 SSD인데다 새 제품에 가까워 백업에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매달 백업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백업을 아예 안 하거나 폴더 정리가 엉망인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번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기존의 삼성 외장하드는 500GB인데 용량이 다 차서 1TB 짜리 도시바 외장하드를 하나 샀다. 노트북과 삼성 외장하드의 자료를 모두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다. 나의 생각은 이랬다. 노트북 자료를 도시바 외장하드에 백업하고, 영화, 다큐멘터리, 음악 용량 크지만, 유실되어도 큰 타격이 없는 자료는 삼성 외장하드에 저장하자! 계획은 물거품이, 도시바 외장하드는 무용지물이 됐다.

 

완벽주의 성향이 발동한 것이다. 노트북 백업하는데 책상 정리가 웬말인가. 나는 지난 주말, 공간부터 정리하자며 작업실을 청소하고 정돈했다. 그리고 삼성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던 노트북 백업자료를 지웠다. 새로운 저장매체로 백업하기 전, 기존 폴더를 깨끗이 정리하고 싶었다. 백업 자료를 지우면서 생각했다. '노트북이 날아가면 끝장이겠고만. 뭐 그럴 일이 있을까, 하루 이틀인데...'

 

그리고 휴대폰에 저장된 녹음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휴대폰 자료가 송부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전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SSD는 복구 불능이라고 하여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복구업체라는 '명데이터시스템' 오송 연구소에 가 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데이터 백업을 미뤘을까? (출판사에 원고 송부하고 하겠다며 미루던 터였다.) 왜 백업보다 폴더 정리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3.

책 원고들(글을 매일 써는 사람이라 원고가 좀 많다), 유니컨 3년 동안의 수업 자료들(이것 역시 원고에 못지 않은 소중한 자료들이다), 여행 사진들(여행도 좀 다니는 편이다), 개인 기록들(친구 면회일지, 강연일지, 소지품 목록 등 난 무엇이든 기록하기를 좋아하는데 이건 곧 나의 역사다). 지난 번처럼 똑같이 이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지난 번보다 더욱 절묘하게 백업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직전이라고는 해도 자료가 날아가지 않았다면 2주는 지나야 백업을 완료했을 것이다. 내가 좀 느리다.

 

지난 주에 수업했던 자료를 와우들과 공유하려고 핸드폰 속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기다 갑자기 다운 되더니,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 노트북은 서비스센터에서 출고 때와 같은 상태로 재탄생했다. 보증 기간 일년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무상으로 수리가 완료됐다. SSD는 데이터복구 전문업체에게 의뢰 중인데, 오늘로써 나흘째 소식이 없다. 3년 전과 비슷하게 전개되는 중이다. 모두 거짓말 같다. 백업하지 않은 내게 화나고, 벌어진 일들에 고통스럽다.

 

3.

오늘 아침, 카페꼼마에서 미술 책을 한 권 샀다. 그림을 보고 싶었다. 화가의 삶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괴로운 판국에 무슨 그림이람? 그래, 괴로움! 이것이 이유다. 나는 지금 괴로워서 예술을 기웃거린다. 휴대폰으로 연결된 이어폰에서는 Sara J. Berg가 부른 <Whrer did you go>이 흘러나온다. 모르는 곡이지만, 지금 여기 카페에서 듣기에 좋다. <삶은 여행> 같은 노래를 음미하며 듣다가는 자칫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니까. 어젯밤, 길을 걷다가 투썸플레이스 차창 테이블에서 어떤 남자의 양말 신은 발을 보았다. 정장 입은 남자가 구두를 벗고 다리를 테이블 받침대에 걸쳐놓은 것이다. 꼴사나워 보였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다. 지금 내가 혼자 카페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저이와 버금가는 꼴이 아닐까?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는 아니다. 생존은 무지 중요하다. 아니, 가장 중요하다. 생존과 안전은 삶의 근간이다. 생존으로 시작되는 삶이지만, 생존만으로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생존과 더불어 '생활'이 이뤄져야 한다. 인간다운 생활, 자기다운 생활, 아름다운 생활! 욕망은 강렬하다. 우리가 종종 과식하고, 과도하게 섹스하고, 나태함에 빠지는 이유다. 매일매일 욕망에 무릎꿇는 삶을 산다면 인간다운 생활이라 할 수 없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예술은 생활을 돕는다. 철학도 생활을 돕는다. 가치도 생활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종종 예술을 감상하고, 잠시나마 철학적 인간이 되어 삶을 사유하며 추구할 가치를 찾는다.

 

이제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지금 내게 벌어진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다시 이겨낼 수 있을까? 이렇게 무기력하고, 가슴이 갑갑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