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생각 속의 나 VS 실제의 나

카잔 2011. 12. 28. 17:07

자신의 생각과 실제 자기는 다를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일꺼야' 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의 나'를 가장 자주 발견하는 현장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곳이다. 누군가의 실제 모습을 알고 싶다면, 그의 말이 아니라 관계적 삶을 보면 된다. 우리는 책상 앞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에 대해 알아간다.

어떤 강사의 지식을 알고 싶다면 그가 강연장에서 하는 말에 경청하면 되지만, 그의 실제 모습을 알고 싶다면 강연장 밖에서의 삶을 보아야 한다. 성공과 성품을 강의하는 어느 강사가 사내에서 젊은 여직원에게 험한 말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말과 삶이 그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말은 그에게 지식이 있음을, 삶은 그의 행동이 비인격적임을.

말과 삶이 다를 수 있듯이, 생각하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이 다를 수 있다. 그 괴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특히 연애할 때의 자신을 들여다 보면 된다. 밀접한 관계는 자기 존재가 훤히 드러나는 곳이다.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도 우리의 일부이고, 가족이나 연인에게 곧잘 짜증내는 모습도 우리의 일부다.

나도 연애해 본 적이 있다. 만나서 데이트하고 뽀뽀하고 함께 밥 먹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은 참 괴롭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 때문에 싸우고,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서 오해하고,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화해를 외면하였던 괴로운 날들을 보냈다. 싸움 자체도 괴로웠지만, 실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도 괴로움이었다.

실제의 나는,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달랐다. 내 생각만큼 고상하지도 인격적이지도 않았다.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주장하기 일쑤였고, 얼어죽어야 할 '멋'을 위해 여자 친구에게 상처를 준 일도 있다. 서른이 넘어서부터 좀 더 나은 연인이 된 것은, 20대의 10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나의 진짜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정했다. 실제의 나는 내 생각만큼 멋지지도, 인격적이지도, 살갑지도 않음을. 그렇다고 해서 추하고 비인격적이고 냉소적인 것만 내 안에 가득한 것은 아니다.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는 말이고, 중요한 것은 '생각 속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간극을 내가 인식했다는 점이다.

인정한 이후로는, 내가 오늘 행한 말과 행동이 오늘 나의 실제 모습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식의 전환이었고, 진짜 나와의 대면이었다. '나 정도면 괜찮지' 라는 착각에서 벗어났고, 생각 대로 살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탓하지도 않게 되었다. '실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처음이 어려울 뿐, 받아들이고 나면 자유로워진다.

'생각 속의 나'에서 벗어나 '실제의 나'를 살펴 보라. 아내에게, 부하 직원에게, 친구에게, 자녀에게 오늘 한 말과 행동이 곧 '오늘의 나'다. '생각 속의 나'는 언젠가 그렇게 해야지, 하는 미래의 모습일 뿐이다. '생각 속의 나'에게 함몰되어 있으면, 사랑과 친절을 실천하지 못했으면서도 인격적으로 행동했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실제의 나'를 인식하면,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착각 속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자기 행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다른 이들의 말에 경청하는 사람이 대화를 잘 하기 마련이니까. '실제의 나'를 만나는 것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길이다.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필요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런 생각들은 대개 '미래의 나'에 대해 말해 줄 뿐, '현재의 나'는 오늘 내가 한 행동과 관련이 있었다. 결국, 자기 경영도 오늘의 나를 바꾸어가는 활동이다. 나를 바꾸어가는 첫걸음이 실제의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 수업을 통해 자기를 알아가는 백년학생이다.

생각 속의 나 그리고 실제의 나. 괴리가 있어도 괜찮다. 괴리를 모른 채 살아왔지만 우리에게는 친구가 있고, 누군가는 우리를 사랑해 주었다. 오늘 글로 인해 괴로움이나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도 괜찮은 우리지만, 두 가지의 나 사이에 있는 괴리를 좁혀간다면 더욱 성숙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달라진 우리를 더욱 좋아해 줄 것이다.

[실천을 위한 조언]

1. 자기를 아는 지식(self knowledge)은 우리의 일상에 실용적인 의미를 지닌다. 자기 지식이 삶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부터 믿어야 한다. 우리의 집중력은 낮다. 확고히 믿는 일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오랫동안 주지 못한다. 수긍하지 않은 일에 노력을 기울일 확률은 낮다. 그러니 자기 지식의 효용성에 대해 신뢰하기 바란다. 인식을 바꾸어야 행동이 바뀐다.
 
2. 자기지식을 얻으려면, 두 가지 접근을 취해야 한다. 하나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감정과 생각을 성찰하는 것이다.(성찰) 다른 하나는 밖으로 드러난 자기 행동과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다.(관찰) 성찰과 관찰은 모두 자기반성적 활동이고, 우리에겐 둘 다 필요하다. 그러니 둘의 조화가 중요하다. 오늘 글은 관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3. 관찰은 내가 행한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 친구와의 내일 약속을 미루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여자 친구가 '필요 이상'으로 서운해 한다고 가정하자. '필요 이상'은 당신의 느낌인데, 이것이 정당한 느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관찰과 성찰을 발휘해야 한다. 

'그의 반응'을 살피고  '나의 행동'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그의 반응은 서운함이다. '필요 이상'의 서운함이라 생각하기 전에 나의 행동도 살펴야 한다. 약속 연기가 불가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매주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는 위기라면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미리 예방하고 사태를 준비하면 되니까. 습관적으로 야근했거나, 약속을 자주 미루는 편이라면 이 역시 자신의 무책임을 인정해야 할 일이다.

물론 그녀가 독립적이지 못하여 지나치게 남자 친구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이번엔 정말 피치 못할 긴급 업무일 수도 있고, 전혀 예상 못한 회사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진짜 위기이거나 긴급 상황인데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필요 이상'의 아쉬움이라는 당신의 느낌은 옳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행동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여자 친구의 불만이 정당할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컨설턴트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