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장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포스터의 풍광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언덕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주택들, 그 사이로 난 도로는 내 앞까지 뻗어 있다. 짧은 스커트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철도 건널목이 "이 곳은 일본"임을 말하고 있다. 나는 저 거리를 거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 
사실 하나 : 짧은 스커트의 교복은 종종 어른들의 성적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사실 둘 : 나도 어른이다.
두 가지의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또 다른 두 가지의 사실 때문이다.
사실 셋 : 대부분의 여중생들은 (어른들의 응큼함과 달리) 순수하다.
사실 넷 : 나도 어렸을 땐 순수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잃어버렸다. 

순수함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영화 <박하사탕>에서 영호의 부르짖음이 떠오른다.
"나 다시 돌아갈래!"

3.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읽었다. 주인공 가즈코는 열다섯 여중생이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즈음, 나도 중학생이 된 듯 했다. 소설 속에 흠뻑 젖어든 것이다. 그리고서 저 포스터를 보았다. 유난히도 짧은 스커트의 학생을 바라보는데도, 나는 순수함만을 느끼었다. 이 때, 나는 성장소설, 청소년소설, 어른을 위한 동화를 자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음란물과 야한 가십거리와는 더욱 멀어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문득, 정채봉 선생은 나보다 훨씬 맑고 순수한 마음을 지녔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는 작가다.)

4. 
짧은 스커트의 소녀, 그 뒤로 보이는 건널목 그리고 조밀하게 붙어 있는 건물들은 내가 상상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었다. 나의 상상이 얼마나 실제의 일본과 일치하는지는 모른다. 상상은 대중매체 혹은 내가 본 몇 편의 영화가 준 이미지일 것이다. 설사 직접 내가 일본으로 날아간다고 해도, 내 상상 속의 일본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로 날아가서 거리를 거닐며 이렇게라도 말해보고 싶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저 상상 속에서 노니는게 더 나았을거야"

하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의 상상이 일본과 일치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의 대답을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표지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을 따를 뿐, 나의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끌어모을 생각은 없다.

5. 
C는 종종 말했다. 태국이 참 좋다고. 다시 가고 싶은 나라 1순위라고. 내가 물었다. 지금까지 어느어느 나라 가보았냐고. 그녀는 태국 뿐이라고 수줍어하며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혹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태국이 세계 최고의 여행지 같다고. 적어도 서너 군데는 다녀오고서 그렇게 표현하는 게 어떠냐고.

지금은 그 말이 괜히 미안하다. 누구나 체험한 것 이상을 그리워하기는 힘들 테니까. 나에게는 중국이 항상 가보고 싶은 나라에 포함된다. 십년 전에 38일 동안이나 배낭여행을 하며 중국의 여러 도시를 주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추억이 나를 강하게 유혹하는 것이리라. 그녀에게 태국이 그렇듯이.

6.
경험은 중요하다. 어렸을 때의 경험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인식하고, 갈망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의 경험이 온통 슬프고 불행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경험'보다 더욱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모든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다. 어제의 나와 결별하겠다는 뜻을 품고 새로운 결단을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하면 된다.

7.
우리가 체험한 것만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가진 적도 없고, 체험한 적도 없더라도 어떤 것을 그리워할 수 있다. 하지만 가져본 적, 체험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은 희미하다. 그리움의 실체도 분명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그리움은 이내 지워져 버릴 것이다.

8.
그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 주어졌을 것이다. 마치 체험한 것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한 이미지로 상상하는 힘 말이다. 인생의 진짜 위기는 자원이 부족할 때가 아니라 상상력이 부족할 때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저명한 사람들은 종종 지식보다 상상력을 강조했다.

9.
무엇이 상상력을 키울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읽으면 도움이 될까? (잘 모르겠으니 읽어보아야겠다.) 그 책을 읽지 않아도 한 가지의 답변을 분명히 내놓을 수 있다. 소설! 상상력의 사전적 정의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이다. 나는 지금 일본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덕분이다.

소설, 더 정확하게는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키운다. 영화도 이야기고, 소설도 이야기다. 이야기는 마치 체험한 것처럼 분명한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를 간접체험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이처럼 한 사람에게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일이 한 권의 책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종종 변화의 시발점이 되기는 했다.

9.
팔라우, 독일, 오스트리아, 중국, 브라질은 다시 가고 싶은 나라들이다. 미국, 인도, 이탈리아는 가보지 못했지만 가고 싶은 나라들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다. 오사카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인상적이지 못했고, 나는 일본 문화에는 무관심했다. 일본어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이 모든 일에 반전이 생겼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읽고서 포스터 한 장을 본 이후로. 우리는 종종 상상하는 것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10.
한참동안 플래너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일본 여행을 떠날 수 있는 3박 4일 동안의 여유시간을 찾기 위해서. 2월 중에는 없었다. 강연과 세미나 일정이 많았다. 와우들을 만나는 일정도 여러 날이었다. 뭐가 이렇게 바쁘담? 좀처럼 하지 않는 약속 변경을 한다면, 가능한 일정이 있나 살펴 보기도 했다. 하나의 약속만 취소하면 3박 4일을 뺄 수 있는 일정이 있었지만 바로 전후로 강연이 있어서 무리일 것 같다.

3월달 플래너를 펼쳐두었다. 3월은 집중 집필 기간인데... 아! 한 권의 책이 고민까지 안겨 주었다. 오늘의 일본 단상과 그리움은, 절반 정도가 책의 힘일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내게 다가온 호기심을 힘껏 끌어안으려는 실천의지 덕분일 것이다. 내가『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나오는 타임리프(시간도약)이나 텔레포테이션(신체이동)을 할 수 있다면, 고민은 사라질 텐데! 오늘 잠시 일본에 다녀오면 될 테니까. 호호. 즐거운 상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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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뜻 2012.02.05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법 긴 글인데도 단번에 읽었어요.
    숫자를 매겨 단락을 구분해준 것이 가독력을 높이는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각 단락을 타고 흐르는 일관된 주제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상상력. 이야기. 경험.

    태국을 그리워하신다는 분은 꼭 제 얘기 같았어요.
    제가 다녀온 "외국"도 태국 뿐이라 (방콕, 푸켓)서요.
    다시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는 물음에 저 역시 "태국"을 답할 것 같아요.
    "체험한 것 이상을 그리워하기는 힘들다"는 말씀이 괜히 좋아
    마음에 머금어 봅니다.

    저도 일본문화에는 관심이 적었어요.
    위안부 할머님과 독도 문제가 뉴스 화면에 떠오를 때면
    일본 싫다'는 막연한 감정만 끌어들이는 정도였지요.
    우리나와 대 일본이 축구라도 하면 그 감정은 고조되었구요. ^ ^

    『시간을 달리는 소녀』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
    제 책장에 꽂힌 800여권의 책 중 소설책은 50권 남짓인데
    그간 소설에 관심이 적었다는 반증이겠죠?
    김영하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덕분에 소설을 조금씩 읽긴 하지만,
    선생님처럼 이렇게 '상상의 나래'에 심취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좋은 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
    이 글을 읽고나니 괜스레 기분이 붕 뜨네요.


    참, 글의 도입부가 진솔하면서도 유쾌하여
    단숨에 몰입됐습니다. ^ ^

  2. 민정 2012.02.06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팀장님,
    저는 애니메이션으로 봤는데요. 꼭 보셔요...^^
    일본하고 애니메이션하니깐 '공기인형'이란 작품도 떠오르네요.
    배두나가 주인공인데, 이것도 추천드립니다...호호

    • 하뜻 2012.02.07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민정언니 맞지요? 저 연주에요. ^ ^

      왠지, 언니가 추천한 작품들이
      내가 알고 있는 언니랑 잘 어울려요.

    • 보보 2012.02.08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늘 혁군님이 에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내 주셨더군요.
      아마 이번 휴일에 보게 될 듯 합니다. ^^
      추천하신 배두나 출연의 영화는 재밌게 보았답니다.

  3. Restar 2012.02.06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츠츠이 야스타카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옛날 작품이기도 하고, 단편이기도 해서 요즘 감성으로 읽으면 조금 재미없었는데말이죠 ^^;;
    그래도 작중의 '라벤더향을 맡는' 표현은, 일본 작품들 속에서 시간여행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더군요. 마치 '차로 88마일을 달리는' 이야기처럼요 ^^
    츠츠이 야스타카의 SF소설들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는 다르게, 사회풍자적인 내용과 약간의 성적코드들이 결합되어 있어서 약간은 읽기 불편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정채봉선생님의 글은 정말 좋지요.
    개인적으로 정말 맑은 글을 쓴다고 느끼는 분들이, 이해인 수녀님과 정채봉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채봉 선생님은 동화의 단어 하나, 하나에도 우리말의 예쁘고 아름다운 표현들을 찾아서 쓰시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분의 단편이었던 '오세암'도 국내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었습니다. 인기는 없었지만요 ^^;
    생각나실때 한번쯤 보시는것도 추천드려요.

    일본은 '서브컬쳐'라고 부르는 문화가 매우 발달한 나라이지요.
    SF나 판타지, 추리같은 장르문학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문화는, 우리나라처럼 소수만 즐긴다는 인식과 다르게, 그들의 인식 저변에 넓게 깔려있는것 같습니다.
    도라에몽(SF), 명탐정 코난(추리)같은 만화책들이 그들의 국민만화가 될 수 있던것도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읽어보시라고 추천드립니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들은, 일본인의 감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구요.
    대표작인 '은하철도의 밤'은, '은하철도 999'같은 애니메이션을 비롯하여, 일본의 수많은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죠.

    그리고 상상력을 키우시기 위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약간 좋지않은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예전 팀장님의 표현에 따르면 '직관'보다는, '감각'에 의존하여 글을 쓰는 경향이 좀 강하거든요.
    개미나 타나토노트 까지는 좋았는데, 이후의 작품들은 자신의 시작점을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아서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상상력과 관련하여 추천드리는 것은, 명작 단편 SF 소설들을 읽어보시는 것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필립 K.딕의 소설들은, 하나하나의 단편들이 통찰력있게 쓰여졌지요.
    SF라는 상상력의 작품이, 현실을 반영하는 소재와 모티브들은 지금봐도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같은 작품만 하더라도, 일본의 서브컬쳐 문화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작품이고요.

    일본의 서브컬쳐, 상상력, 이야기에 대한 주제는 제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중 하나라서 좀 댓글이 길어졌네요. ^^;
    즐거운 상상속에서, 앞으로도 팀장님의 인식과 세계가 더욱 더 넓어지시길 기대합니다. ^^

    • 보보 2012.02.10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자기 관심분야의 주제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떠올라
      괜히 저까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읽었네요.
      일본문화에 대한 설명이 특히 고마웠습니다. ^^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매료될 만큼 재밌지는 않았습니다.
      글에서도 책 이야기보다는 일본에 대한 제 관심을 썼지요.
      구조가 단순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묘한 여운이 남더군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읽어볼 요량입니다.
      '감각'으로 쓰였다고 하니 더욱 끌림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