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삶의 경이를 불러오는 단어

카잔 2014. 3. 6. 11:29

<인문주의를 권하다>라는 원고를 쓰는 요즘입니다. 꽤 긴 글인데, "인문정신을 찾아가는 3가지 질문"이란 내용이 있지요. 그 중 하나의 질문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앞뒤 내용이 없어도 읽히는 독립적인 글인 것 같아,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여러분, 삶에 경이로움이 가득하기를 기원 드리며...

 

어머니 뱃속에서 탄생을 기다릴 무렵, 나의 친부는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인생이다. 어느 한쪽에서는 태어나고 다른 쪽에서는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2013년엔 내 생애 최고의 선생님이 59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갖다 대기엔 젊은 나이다. 미망인이 된 사모님은 한동안 삶의 의미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셨다. 딸에겐 미안한 일이나, 손주를 봐도 데면데면하셨단다. 6개월 즈음 지나니, 손주의 재롱이 눈에 들어오면서 마음의 위로가 되셨다며 말씀하셨다. "그는 떠났지만, 아기는 탄생하여 자라고… 이것이 삶이겠구나." 태어나 자라고 언젠가는 죽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나의 삶, 그리고 당신의 삶.

 

나는 1978년 1월 9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도 정체된 적이 없었다. 생물학적으로는 대략 스물다섯까지 성장했고, 그 이후로 노화가 진행되었다. (노화는 중년과 노년의 전유물이 아니다. 노화의 축적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할 뿐 스물다섯이 지나면서부터 노화가 진행된다고, 과학은 말한다.)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도 대체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삶의 고통을 만날 때에는 한없이 퇴보하는 느낌이었지만, 눈물이 나더라도 고통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 성장을 경험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의 육체는 끊임없이 노화가 진행되어왔으리라. 노화 그리고 그 다음은?

 

그렇다, 죽음이다. (신나게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던 손가락이 죽음이란 단어를 쓰고서 뚝 멈췄다. 나의 죽음이 상상되어서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죽음이 상상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 상상할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지금이 아닌 언젠가가 되더라도 좋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이롭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더욱 우리답게 만드는 힘을 지녔으니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예외는 없다. 당신이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어떤 글도 읽지 못할 때가 온다. 당신이 소중한 이와 사별한 경험이 없다면, 내 말이 아득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최근 2~3년 사이에 지인의 죽음을 목격한 분들은 좀 더 실제적인 이야기로 와 닿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의 지혜를 가꾸는 일이다. 나는 지혜를 가꿀 기회가 많았다. 친부가 사망한지 15년 후에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외삼촌과 외숙모가 나를 키우신 덕에 나는 학창시절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죽음은 내가 목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함께 독서실을 다니던 친구가 독서실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대학교 같은 과 동기는 군대에서 총구를 자기에게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어느 스승의 날, 학창 시절에 나를 극진히 아끼셨던 은사를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께선 2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여러분의 위로를 얻고자 내 슬픈 경험들을 나열한 건 아니다. 죽음이 우리네 삶 곳곳에 존재함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죽음 없는 삶은 없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삶이 신선한 공기처럼 새롭게 느껴진다. 당연함은 사라지고 경이로움이 찾아든다.

 

남들보다 일찍 지인들과의 사별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주기적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것은 비장한 사유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남들보다 조금 생생하게 인식한다는 말이다. 일년에 한 두 번씩 찾아오는 그 즈음에는 내가 좀더 살아난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생경할 정도로 경이롭다. 날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마치 누군가가 돈을 쥐어준 것처럼 감사하고 놀랍다. 죽음을 생각하는데 삶의 생기가 돈다. 묘한 경험이지만, 당연한 소리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의 충만함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생의 소중함은 시들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떠날 것이기에 생이 감사하고 소중한 것이다. 벚꽃이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피어있다고 상상해보라.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듯, 사람들은 벚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리라.

 

생의 경이로움을 회복하는 것 말고도 죽음에 대한 인식이 주는 유익이 있다. 사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 어제의 일이다. 나는 우연히 외장하드에서 십 수년 전의 사진 파일을 발견했다. 몇 장의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아는 동생에게 전해주었다. 그가 찍힌 사진들이었고, 나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사진만 보내기 머쓱하여 사진을 보낼 때의 내 기분을 몇자 적었다. “우리, 평생 우정으로 건강하게 지내자. 그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지 새삼 느껴지는 날이네.” 그는 지혜로운 회신을 보냈다. “네. 저는 형하고 노인이 되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끔 상상합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이니 기회 있을 때 부끄럽지만 한 말씀 드리죠. 하나님께서 형을 만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소중한 이들에게 늦지 않게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게 만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죽음은 ‘우리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다. 물론 다른 중요한 사실도 많다. 인간은 사랑하고, 일하고, 성 행위를 즐기고, 우정을 맺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온갖 감정을 느낀다. 이것 모두는 사소한 일이 아니고 이중 일부가 부재하면 진정한 삶이 아닐 것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기 때문이다.” 철학교수 토드 메이의 말이다.

 

우리의 사랑과 우정은 죽음으로 단박에 끝난다. 그동안 개입했던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가져온 끝은 완성이 아니라 그냥 거기서 멈추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죽음은 '완성'이 아닌 '중단'임을 작가들의 사례로 설명하겠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마지막 작품을 못 다 쓴 채로 세상을 떠났을까? 고대 로마 최고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도 <아이네이스>를 완성하지 못하고 떠났다.『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머릿 속에 구상한 소설을 못 다 쓰고 떠나야 했다.

 

“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아. 나는 세 개의 웅대한 주제, 세 개의 새로운 소설 때문에 또다시 고통을 받게 되었어. 하지만 난 우선 『영혼의 자서전』을 끝마쳐야 해.” 그에겐 『영혼의 자서전』을 마무리한 것이 마지막 축복이었다. 그는 이 소설의 시작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선 작가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명문이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해는 졌고 언덕들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산맥에는 아직 산꼭대기에 빛이 조금 남았지만 성스러운 밤이 감돌고 있으니, 밤은 대지로부터 솟아 나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구원이 없음을 안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지만, 숨을 거두어야 하리라.”

 

니코스도 결국 떠났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철학적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지만, 죽음에 대한 니코스의 생각을 통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는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우리들은 매를 맞고 눈물을 흘리는 노예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마셔서 이제는 아쉬운 바가 없는 왕처럼 이 땅을 떠나야 한다.” 나는 정말 왕처럼 떠나고 싶다. 내 가진 재능을 한껏 소진하고 열정을 다한 삶을 살고서 말이다. 여러분도 나와 같다면, 저렇게 죽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변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우리를 더욱 우리답게 만드는 가치가 되지 않겠는가.

 

니코스는 이런 말도 했다. “난 베르그송의 말대로 하고 싶어. 길모퉁이에 나가 서서 손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거야. <적선하시오, 형제들이여! 한 사람이 나에게 15분씩만 나눠 주시오.> 아, 약간의 시간만, 내가 일을 마치기에 충분한 약간의 시간만이라도 얻었으면 좋겠소. 그런 다음에는 죽음의 신이 얼마든지 찾아와도 좋아요.”

 

언젠가는 우리도 남은 시간이 부족하여 아쉬워할 날이 올 것이다. 젊은 날에 탕진했던 시간들을 되찾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카잔차키스의 아내는 강렬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저주 받을지어다! 죽음의 신은 찾아와서, 젊음의 꽃이 처음으로 피어나려는 니코스를 꺾어 버렸다. 그렇다, 친애하는 독자여, 웃지 마라. 그대가 그토록 사랑했고,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가 시작한 모든 일이 꽃피고 열매를 맺으려는 때에 꺾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웃으면 안 된다.”

 

니코스의 마지막 순간을 대하며 누가 웃고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웃지 마라는 당부보다는 잊지 말자고 당부하고 싶다. 누구나 젊음의 꽃이 어느 때고 꺾일 수 있음을 잊지 말자고. 죽음에 대한 인식, 다시말해 죽음의 필연성과 불확실성을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이 경이롭게 보이고 새로운 의식을 창조할 수 있음을 잊지 말기를, 아니 진하게 맛보기를 바란다. 죽는 것은 확실하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이것은 우리 삶에 어떤 교훈과 의미를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