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명저 이야기

리어 왕과 세 딸들에 관한 단상

카잔 2014. 4. 18. 11:36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은 욕망의 몰락을 다룬 비극이다.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지는 리어왕의 어리석음, 거짓을 일삼는 딸들의 탐욕, 형제마저 죽이려 드는 그녀들의 욕정, 이 비극은 모두 끝없는 욕망의 결과다. 여기에 글로스터 백작의 아들 에드먼드의 욕망까지 곁들여져 <리어 왕>은 그야말로 추악한 드라마가 된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막장 드라마를 좋아한다. 막장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극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어왕>이 보여준 세상의 일면은 무엇이었나? 우선 제1막의 줄거리부터 요약해 둔다.

  

리어 왕은 브리튼의 국왕이다. 왕은 너무 늙어 세 딸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에게 국토를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딸들에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묻는다. 고네릴과 리건은 과장되이 표현하여 국토의 1/3씩을 얻었다. 코델리아는 자신의 애정을 담아낼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하여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에 노한 리어왕은 코델리아를 추방하고 막내 딸 몫의 영토까지 두 딸에게 나누어 준다.

 

1. 물어서 알 수 없는 것을 묻는 어리석음

 

사랑은 추상명사다. 추사명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추상명사를 인지하는가? 믿음, 사랑, 용기와 같은 추상명사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 행위를 통해 잠시 존재했다가 행위가 끝나면 사라진다. "나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예요"라는 말을 통해서는 용기를 알지 못한다. 물속에 잠겨가는 '세월호'에서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건넨 고등학생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용기가 무엇인지를 본다.

 

리어왕은 마음으로 느껴야 할 사랑을 자신의 귀로 듣기를 바랐다. 말보다는 '행위'로써 판단해야 하는 게 사랑인데, 불완전하게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언어'로 판단하려 했다. 언어는 인간 사회의 소통을 돕는 훌륭한 도구지만, 인간사를 모두 표현해주는 만능 매개체는 아니다. 리어왕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과오를 범했다! 과오는 삶에 크고 작은 결과를 가져온다.

 

누구나 리어왕의 욕망을 가졌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기 좋은 말을 원하는가? 말로 표현되기 힘든 것들을 얼마나 자주 한 두 마디의 말로 확인하려 드는가? 리어왕이 들은 말은 사실과는 매우 달랐다. 그러니 듣고 싶어하는 욕망을 컨트롤하라. 이성을 발휘하여 옳은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라. 욕망을 품으면 이성을 잃는다.

 

 

여인들이여 남성들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마라. 물으려거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감성을 내려놓고 먼저 이성을 챙겨 들어라. 부모들이여 자녀들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들지 마라. 지금까지의 행동이 곧 그들 사랑의 표현이니까. 나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그들이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마음에 정해 놓고서 묻는 이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진실보다는 듣기 좋은 말만 듣게 될 것이다. 진실에 화를 낼 것을 사람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로부터 진실을 듣고자 한다면, 진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부터 갖춰야 한다. 불쾌해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리어왕처럼 이성을 잃는다면, 아무도 진실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이 깊은 이들은 보지 않고서도 믿는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은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다. 신은 사람들의 의심이 극에 달할 때 기적을 보여준다. 그때  신은 '보지 않고서도 믿으면 좋으련만' 하시며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딸아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아비의 질문에 코델리아도 안타까웠을 것이다. '아버님, 제가 굳이 말씀드려야만 아시나요?"

 

2. 고네릴과 리건을 비난할 수 있는가?

 

고네릴과 리건은 부왕에게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표현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두 딸의 위선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녀들의 아버지는 권력과 부를 지닌 한 나라의 왕이었다. 대다수의 우리네 아버지는 부와 권력 둘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우리가 탐욕과 위선에 빠지지 않은 것은 고네릴과 리건보다 성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유산이 막대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만약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애국지사가 되었을까? 친일파 인사로 살았을까? 만약 1905년에 태어났다면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무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일제 치하에서 인생을 보낸다. 거기에서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조국' 독립의 이상을 위해 투쟁할 수 있을까? 독립 투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서 장담하기란 힘들다. 막상 그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평소 했던 말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 태도를 넘어 기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일제시대에 태어난다면, 친일 성향의 삶을 살 확률이 높다. 태도는 상황과 결합하여 다양한 자식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태도'가 조국을 빼앗긴 '상황'을 만나면 나라를 버린다.

 

최근, 미국의 명문대를 다니는 학생이 포르노 배우로 활동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듀크대의 학생 '벨 녹스'다. 비싼 학비를 벌기 위해서란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밝혔다. "오늘 나는 포르노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공개키로 했다. 내 이름은 벨 녹스이며 자부심을 안고 내 ‘주홍글씨’를 기꺼이 지니고 가겠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80%가 포르노물이다. 사회가 나를 소비하면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지극히 위선적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 처지에 맞는 효성을 다하지 못한 채로 고네릴과 리건을 비난한다면, 그것 역시 위선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사악한 자매보다 선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녀들의 불효와 우리의 불효를 비교하려면 아버지의 부와 권력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부와 권력이 없는 부모를 모신 우리에게 효와 불효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것을 잘 지켜가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평범한 가족의 초상은 어떠하며, 부모와 자녀는 서로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최근 개봉한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은 불행한 가족의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가족이다. 그들은 가족인데도 서로 무관심하다. 심지어 첫째 딸은 부모와 연락을 끊고 지낸다. 재벌집 자녀들이 탐욕으로 싸우는 것이 불효라면, 소시민적 가정의 자녀들에겐 무엇이 불효일까?

 

뜸한 연락(안부를 전할 줄 모르는 나의 불효가 부끄러워진다), 부모의 용돈이 부족한 줄 알고 여윳돈이 있으면서도 눈을 감아버리는 이기심(책 살 돈은 항상 있다는 사실이 한심스럽다), 부모를 돌보기 싫어 형제 자매끼리 떠미는 모습은 모두 불효다. 이런 자녀들이 리어 왕을 모신다면, 권력과 돈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불효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는 게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엔 효심보다 불효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저 그런 삶에 안주하자는 것은 아니다. 효성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되, 우리의 현실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은 인식하자는 말이다.) 우리의 고네릴과 리건 비난이 위선일지도 모른다. 막대한 유산을 받는 상황에 처하기 전, 누가 고네릴과 리건의 (서로 땅을 차지하려는 거짓말을) 비난할 수 있을까?

 

3. 코델리아의 순수함은 순진함이 아닐까?

 

막내 코델리아는 아버지를 지극하게 사랑했다. 그녀는 언니들의 교활함도 알았다. 부왕이 물음에 자기에게 오자, 그녀가 한 말은 고작 "아무 것도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였다. 언니들의 처사가 사악하다면 코델리아의 처사는 답답하다. 그녀는 선하지만, 비극적 상황을 헤쳐갈 용기나 지혜는 없었다. 코델리아는 왜 사랑 표현을 포기했을까? 모를 일이지만, 다음과 같이 자의적 해석을 시도할 순 있겠다.

 

1) 고결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결과 섞이지 않겠다는 태도다. 언니들이 거짓 수사로 사용한 도구는 말이었다. 말은 이미 더러워졌으니, 자신은 그 도구를 쓰지 않겠다는 고결주의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다. 말은 도구다. 도구엔 선악의 가치가 없다.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질 뿐이다. 

 

(어리석은 고결함의 예 : 말이 많은 사람(K라고 하자)도 자신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말이 줄어든다. K는 생각한다. '저 사람 정말 말 많군. 나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지.' 이것은 지혜로운 판단이 아니다. 사람들은 K가 말이 많은 사람임을 안다. 이미 비슷한 부류로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K의 올바른 판단은, 한 사람이 대화를 독차지하지 않도록 자신도 끼어드는 것이다.) 

 

2) 이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자기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기대하는 태도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을 말로 표현하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만이 빛난다고 여긴다. 이러한 은근한 기대 역시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속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고, 자기 식대로 상대를 바라볼 뿐이다. 소통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을 간과한 채로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지나치게 안일하고 이상적인 태도다. 코델리아가 표현을 하지 못한 원인이 이상주의 때문일 거라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상적인 태도를 배제할 수도 없다. 리어왕의 분노에 다소 의아해하고 당혹스러워하기 때문이다.   

 

3) 안목이 없었던 것이다. 리어왕의 코델리아의 대답에 분노했다. 이성을 잃고 단칼에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충신 켄트 백작이 목숨을 걸고 중재했지만 소용없다. 효심이 부족하지 않음을 충언하지만, 리어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코델리아는 착하기만 하고, 아비의 이런 성정을 전혀 몰랐단 말인가? "비옥한 영토를 받기 위해 너는 무어라 말하겠느냐?"라는 아비의 물음에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불러올 비극을 예상할 순 없었을까?

 

안목 없음의 불명예까지 코델리아에게 씌우고 싶진 않다. 리어왕의 분노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사건이고, 그러한 사건은 종종 캐릭터의 성격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코델리아의 대답이 언니들의 사악한 경지 만큼이나 답답함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들의 위선과 아첨에 기가 막혔을지라도, 아무리 비슷한 말을 늘어놓기 싫었을지라도 진실 해명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남성들이여, "나를 얼마나 사랑해?"라고 여인이 물어오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라. 당신의 사랑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을지라도 노력을 멈추지 마라. 어쩌겠는가. 상대가 표현해 주기를 원하는데! 괜히 고결함을 추구하다가 여인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목격할 필요는 없잖은가.

 

코델리아는 순진했다. 마음이 꾸밈이 없고 순박하다는 뜻을 가진 '순진'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하다는 뜻도 지난 단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줄꺼야. 그러니 나는 진실하게만 살면 돼' 라는 생각은 분명 맑은 마음이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모습이기도 하다. 순진함이 곤경을 불러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는 코델리아의 순진함, 언니들의 교활함 그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