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명저 이야기

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카잔 2015. 11. 4. 08:46

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 『그리스인 조르바』 독법 하나

 

순진한 이상주의자는 어두운 현실을 곧잘 외면한다. 꿈을 추구하다가도 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면 절망하거나 힘들어한다. 이상성을 실현하지 못한 채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 이상성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이상주의자는 진흙투성이 현실 속에서 이상의 꽃을 피워낸다. 경멸스러운 현실이더라도 직면하여 그 속에서 삶을 일군다. 조르바는 자신의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는 사람 볼 줄을 알기에, 조르바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매료된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조르바와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나'는 자신에게 고용된 인부들을 이해하고 애정하려고 애썼다. 갈탄광이 성공하면 그들과 형제처럼 지내려는 계획도 세웠다. 이상이 있었기에 인부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조르바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두목, 인간이란 짐승 이예요. 그것도 엄청난 짐승 이예요. (중략)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p.81~82)

 

조르바의 의중은 무엇일까? 인간을 존중하지 말고, 비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조르바는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짓밟은 경험을 두고 괴로워했다. 적어도 전쟁의 야만성을 증오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지랄이 도저 우리에게 별로 나쁜 짓도 안 한 놈들을 덮쳐 깨물고 코를 도려내고 귀를 잘라내고 창자를 후벼내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그랬을까? (중략)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 봐요. 사람 잡아 먹는 야수 말이오.”(p.34)

 

인간은 짐승이다, 거리를 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당한다는 말은 인간을 존중하지 마라, 인격적으로 대하면 위험해진다고 섣불리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인 삶의 지혜와 모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이 책의 거의 모든 메시지를 조르바와 '나'의 특성을 모두 이해하여 통합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육감주의자 조르바의 가치는 경건주의자 ‘나’의 가치와 결합될 때 제대로 빛난다.

 

다른 하나는 조르바가 짐승이라 말한 대상을 엄밀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인지, 군중으로서의 인간인지 말이다. 전쟁 경험에 대한 그의 후회스러운 발언은 무의식적 집단행동을 일컫는다.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집단의 광기 말이다. 그렇다면, 조르바의 인간은 짐승이라는 발언은 개인은 존중하되, 무리는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라인홀드 니버의 책 제목이기도 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적 사회'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명제 중 하나다.

 

조르바에 매혹된 화자도 이번에는 동의하지 않고 대들었다.(카잔차키스는 대들었다고 표현했다. 문맥상 어색한데, ‘인간은 짐승’이라는 조르바의 신념도 일종의 믿음이기에 이에 대한 화자의 반발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조르바, 당신은 아무 것도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조르바는 관념과 이상보다는 구체와 현실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답변이 걸작이다.

 

"안 믿지요. 나는 아무도,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요.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p.82)

 

신뢰할 만해서가 아니라 그나마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여서 자기를 믿는다는 말은 내 생각을 끄집어 낸 것 같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자도 동의했나 보다.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채찍이 되어 날아들었다. 강인했기 때문에 그토록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려는 그를 나는 존경했다. 나라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금욕주의자가 되었거나 그들을 가짜 깃털로 꾸며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p.82)

 

조르바는 달랐다.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했다. 믿지 못할 것들을 불신하면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인생사를 즐겼고 순간마다 몰입했다. 살아보았더니 별 거 없더라, 고 말하는 부류와는 달랐다.

 

"조르바는 난장판이 된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며 늘 경이로 반짝이는 조그만 실눈으로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습관이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중략)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p.77)

 

조르바의 마법은 '나'에게 생기를 안겨다 주었다.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다시 태초의 신선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지겨운 일상사가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떠나던 최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다."(p.78) 조르바의 위대함은 양극적 지혜에 있다.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염세주의자는 세상에 많다. 아침이슬에 감격하는 감상주의자도 많다. 하지만 인간을 믿지 않으면서도 감탄을 잃지 않는 명랑한 회의주의자 또는 감탄하는 염세주의자는 드물다. 조르바는 그 드문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경멸하는 인간과 더불어 살고 일하는 조르바에게 감탄한 날, '나'의 가슴은 고무되었나 보다. "오늘 밤은 졸리지 않는데요, 조르바. 혼자 주무셔야겠어요."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을 묻고 침묵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밤과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p.83) 그는 유연한 학습자요, 신실한 명상가요, 뛰어난 수행자였다.

 

사실 조르바만 남달랐던 것은 아니다. 화자 역시 탁월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이의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화자는 조르바에게 매료되기 이전에 조르바를 발견했고 이해했고 수용했다. 매료보다 발견과 이해가 앞섰다. 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나’ 역시 대단하다. 그 날 밤, ‘나’는 다짐했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그리고 속삭였다. "아직 그렇게 늦은 건 아닐 거야."(p.83) 조르바의 펄떡이는 지혜와 반짝이는 영감이 화자에게 빛이 되었던 밤이었다. 이처럼 『그리스인 조르바』 읽기는 화자가 조르바의 가치를 익혀가는 과정, 즉 '나'의 조르바화(化)를 음미하는 과정이다. 독자들은 양극적 사유를 통해 즐겁게 ‘나’와 조르바의 가치를 익혀가면 될 것이다. (연지원)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세계문학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