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서른, 직장 생활을 돌아보다!

카잔 2008. 4. 1. 17:00

 

『칼리 피오리나 * 힘든 선택들』을 읽고서 저자와는 비할 바 못되는 짧고 소박한 저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입사했던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는데, 대개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고 가끔씩 추억과 행복감에 젖기도 했습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나의 과거는 나의 미래를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자원 중의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니, 유익한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꽤 길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의 관심 있는 일독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2002년 1월의 어느 날, 저는 동생과 함께 강릉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등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고 옷 한 벌을 챙겼습니다. 동생과 함께 떠나는 1박 2일간의 동해 여행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강원도의 겨울은 동화 속 눈꽃나라처럼 온통 은빛입니다. 은하철도 999가 우주의 어두움을 헤치고 나아가듯, 우리가 탄 무궁화호는 강원도의 은빛 산자락을 통과하며 강릉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처음으로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었기에 우리 형제는 조금 설레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6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을 조금은 지루해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다가 혹은 동생과 얘기하다가 조금씩 졸기도 하며 기차 여행을 즐겼습니다.

드디어 강릉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 경포 해수욕장에 갔습니다. 겨울바다의 시원함과 겨울하늘의 청랭한 기운이 더없이 상쾌했습니다. 하루 종일 달려왔기에 해질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바다를 조금 둘러보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숙소를 정하여 여장을 풀었습니다. 형제는 일찍 잠들었습니다. 이튿날, 바다를 다시 한 번 바라보다가 우리는 경포대로 이동하였습니다. 경포대에는 신사임당 상이 있었고, 그 뒤편에는 왼쪽으로 오솔길이 나 있었습니다. 한적한 산길이었고, 형제는 경포대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른쪽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왼쪽에는 소나무 숲이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저는 인생의 메아리 법칙을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메아리 법칙은, 산에서 소리치면 메아리로 돌아오듯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3년 후 5년 후 혹은 10년 후에 인생이 그 메시지를 현실로 들려준다는 법칙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류의 얘기지만 나는 왠지 이 법칙이 좋았고 믿어보기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는 3가지 소원을 외쳤습니다. 첫 번째 소원을 외치고 동생에게도 해 보라고 하니, 부끄럽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걷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두 번째 소원을 힘차게 외쳤습니다.
“나는 한국리더십센터에 입사할 수 있다아아아아아아~!”

인생의 메아리 법칙을 믿어보기로 한 것에 대하여 참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두 번째 소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2002년 9월에 나는 한국리더십센터의 모범사원 2기에 지원서를 냈고, 합격하였습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당시, 활동하였던 OPE 커뮤니티의 HR 업을 하시는 수많은 선배님들이 축하해 주셨고, 가족들은 저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새삼스레 면접을 보았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이 면접을 위해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여자 친구는 갤럭시 정장 한 번을 사 주었습니다. (아직도 가을이면 저는 종종 이 정장을 입곤 하는데, 그 때마다 면접 장면이 떠오르지요.) 면접 볼 때에 떨긴 했지만, 질문에는 자연스럽게 답변을 한 것 같습니다. 자신감은 늘 긴장감 속에서도 빛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서울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살아야 하고, ‘한국리더십센터’라는 곳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5년간 지냈던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아쉬움이기도 했지만, 나의 꿈을 향한 도전이 있었기에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이별은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저는 한국리더십센터 출근하기 전 주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마냥 기뻤고, 내 꿈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한 푼의 돈도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저는 단돈 10 만원도 없이 올라왔습니다. 가슴 깊은 속에 ‘비전’을 품은 것을 제외하면 저는 참으로 무모하게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엔, 청계 8가 근처의 홍익동에 계시는 이모할머니 댁에서 생활였습니다. 저는 3개월 수습기간 후의 피드백을 거쳐 정규직 사원이 되었습니다. 정규직이 되기 전까지의 제 월급은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새로운 삶에서의 꼭 필요한 지출은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큰 마음을 먹고 노트북을 구입했습니다. 매월 30만원에 가까운 돈을 10개월 납부해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노트북 할부금을 내고, 차비와 식비 등을 제외하면 제 용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주 가끔씩은 돈이 없어 점심 식사를 거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물을 마신 후에 회사 강연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곤 했었지요. "대리님, 점심 사 주세요" 등과 같은 부탁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렇게 밥을 굶기는 하였지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은 저를 힘차게 살아가게 했습니다. 자기 연민 따위의 감정이 저를 찾아올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꿈꾸었던 회사에 입사한 것이 좋았습니다.

그 때의 제 삶은 분명 TV에서 봤던 멋진 독립생활은 아니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꿈꾸었던 남자 주인공의 분위기 있는 삶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미지의 세계로 용기 있게 한걸음씩 내딛었고,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내 꿈을 향하여 전진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 아주 만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출근한 날에는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건대입구역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 정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환승을 위해 이동하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수많은 인파를 보며 ‘내가 정말 서울에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와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 장면이기도 합니다. 야근을 해야 하는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는 한 사람의 직장인이었기보다는 힘들면 훌쩍이는 어린아이였습니다.

늦은 입대를 하고 세월이 흘러 2005년 9월, 저는 B2B 영업팀으로 복직하였습니다. 복직하기 전, 영업에 관련한 책 몇 권을 읽었습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와 『한국의 세일즈명인』을 읽으며 저는 프로페셔널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새로운 팀에서 뭔가를 훌륭히 이뤄내고 싶었고, 회사 내에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출근하였고,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와서 일하곤 하였습니다. 집까지 일을 들고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으며, 집에 돌아가면 쓰러져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일과 삶의 균형을 놓치고 있다고 말할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저는 제 일에 굉장한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내 모든 삶의 중심은 회사였습니다. 우리 집은 회사와 지하철로 7분 거리였고, 내가 그 곳으로 이사한 것은 오직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회사와 집, 그리고 주말에는 교회에 가는 것이 제 삶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저였지만, 당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류의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영업 첫 해의 영업성과가 나오고 저는 그런대로 만족했습니다. 기대했던 목표까지는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성실함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팀내에서도, 회사에서도 저의 성실함만큼은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더욱 기뻤습니다. 그 때, 저는 외근을 나가서도 일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고객사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출력해 온 고객사 정보를 읽거나 영업 관련 단행본을 읽었습니다. 2개의 고객사와 미팅 약속이 있을 때에도 저는 3개의 영업 KIT 을 들고 나가서 방문한 고객사 주변의 기업체에 찾아가곤 하였습니다. 숫기 없는 제게는 퍽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유능한 직원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그런 용기를 가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루에 8개의 기업을 방문하고 팀 회식에 뒤늦게 합류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압구정동의 어느 파스타 전문점에서의 팀 회식이었습니다. 팀장님과 직속 상사가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수고한 팀의 막내를 참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었습니다. 저는 회사 안에서 인간적인 정을 느꼈으며, 그 이후 저의 직장 생활은 더욱 안정되어갔습니다. 일은 무척 재미있었고, 야근까지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많은 업무량은 힘겨웠지만 저는 더 이상 울거나 힘겨워하지 않았습니다. 3년 전의 어린아이가 이제는 완연한 어른이 되었음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2006년, 저는 회사 내에서 보다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사내 임직원들의 독서PM이 되어 직원들의 독서모임을 진행하였으며, HR 관련 업무를 하였습니다. 관련 경력이 없었지만, HR 업무를 함께 하던 팀장님이 퇴사하셔서 제가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HR 분야는 대학 때부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회사에서 알아 준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직 성과를 낼 만한 역량은 없었던 시기였기에 잘 감당해내지는 못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영업 이외의 일들을 많이 맡게 되면서 나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조직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즐거운 행복이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 연봉 협상을 하며 제가 원했던 금액으로 협상이 맺어지는 것도 무척 고무적이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직장 생활이 참 즐거웠습니다. 제 직속 상사와는 서로 신뢰하고 좋아하는 관계였기에 아주 편안했으며, 몇몇 동료들과의 관계도 점점 두터워졌습니다. 부하직원으로 생각한 적은 없지만, 직급이 저보다 낮은 팀원은 처음부터 저를 좋아하고 신뢰해 주었고, 덕분에 관계도 아주 좋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장님께서도 저를 신뢰해 주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네요. 아직 경영인의 마음은 잘 모르겠더라구요. 회사는 출근하기에 참 편안한 곳이었고, 저는 일해야 할 만큼 열심히 일했습니다. 집 다음으로 중요한 장소가 직장이니 직장에서의 행복이 없으면 행복한 인생을 살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참 행복한 20대 후반을 보내었습니다. 그 때에는 여자 친구도 있었으니 부러울 게 없었지요.

저는 좋은 컨텐츠를 담은 시간관리 교육과 플래너로 영업을 한다는 게 좋았습니다. 개인으로서는 출입하기 힘든 여러 좋은 기업을 방문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었습니다. IT 기업들의 미팅룸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묻어났습니다. DAUM과 넥슨이 그랬습니다. 삼성전자, SK, KTF 같은 대기업은 역시 고급스럽고 넓었습니다. 삼성코닝, 삼성전자 연구소 등이 있는 탕평단지에 갔을 때에는 세계적인 대기업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하진 않지만 야후코리아,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삼영전자, 대우일렉트로닉스, 소니코리아 등에서의 미팅은 개인적인 의미로 남아있는 방문이었습니다. 저는 사원에서부터 부장까지의 직급에 있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비즈니스로 맺어지는 만남이지만 의미 있는 관계로 발전시키고 싶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미팅은 때로는 긴장되기도 했지만 제가 이 일을 좋아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영업성과는 그다지 탁월하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영업 사원으로서 성과와 숫자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저는 칼리 피오리나의 말처럼 “가진 능력과 재능을 모두 발휘하려면, 나 자신을 가지고 뭔가 이루려 한다면,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었고, 저는 영업이 제가 평생 해야 할 일인지 고민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영업이 아주 재밌고 매력적인 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영업은 내가 원하는 일들 중의 하나였지, 가장 원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내 삶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저는 영업이 퍽 재밌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의 전문성을 키우기에 최적의 일이고 내가 있는 곳은 최적의 학습 장소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승리가 없으면 언젠가 거기에서의 승리도 없다.’ 영업이 재밌던 것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영업을 좋아했지만,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영업을 더 잘 하기 위한 어떤 일을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연간 목표와 나의 회사내 직급을 생각하며 영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강연에 대해서만큼은 달랐습니다. 나는 자주 강연에 대하여 생각을 했고, 어떠한 지식들을 강연 자료로 정리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강연은 내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었고, 제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강연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보다 학습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약 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을 하고 싶다면, 저는 꽤 오랫동안 조직을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직 내에서 그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창출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며 훌륭한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축구 선수였던 히딩크였지만 세계적인 명장이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선수 시절의 수준과 감독으로서의 수준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 선수로서의 훌륭한 성적은 감독이 될 때에 프리미엄이 될 것입니다. 프로야구 선동열 감독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과 함께 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도 함께 했습니다. 내가 조직이 아닌 개인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긴 기간의 조직 생활이 필수는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끊임없는 배움은 필요하겠지만, 더 높은 학위는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마틴 루터 킹의 말처럼 위대한 일을 하는 데에는 학위도 자격도 필요없다는 말을 늘 생각했습니다. 바로 봉사야말로 위대한 일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말입니다. 실제로 복지관에서의 강연에서는 어려웠던 나의 학창 시절과 평범한 커리어가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가 되곤 했습니다. 그 분들은 강사인 저를 다른 세계에서 온 비범한 인물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온 평범한 사람으로 바라봐 주었습니다. 나의 메시지는 ‘이상적인 강령’이 아닌 ‘실천할 만한 지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점에서 행복했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과 평생 함께 할 사명을 지녔다면, 나는 더 이상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어떤 성취를 쌓기 위하여 노력하고, 학위를 따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기보다는 지금 바로 그들과 함께 하면서 영향력을 줄 만한 삶을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물론 평생 '독서대학'에서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기본일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독학을 통하여 쉽게 검증받을 수 있는 학위 이상의 진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더욱 고군분투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독서대학은 독학을 하며 공부하는 것을 의미함)

저는 이 글을 서른 즈음에 쓰고 있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 저는 만 서른이 됩니다. 삼십 년을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들 중에 직장 생활과 관련한 것들을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떠오른다는 것에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송OO 팀장님, 하OO 본부장님, 이OO 사장님, 그리고 이OO 대리를 비롯한 친하게 지냈던 여러 명의 동료들. 이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 저의 무관심이 얄미운 순간입니다. 저는 그렇게 냉랭한 사람이 아닌데, 한 때는 회사 일을 하느라, 또 한 때는 제 일을 하고 여자 친구랑 지내느라 직장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회사 일을 하며 배운 것들도 하나 둘 떠오르네요. 회사에는 야근이 있고, 그래서 야근까지 즐길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신뢰와 성실로 일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심감을 얻었고, 여기에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예를 갖춰 대하는 마음가짐까지 있다면 더욱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조직은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발견하기에 좋은 학교라는 점과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내지 않으면 조직의 특성에 묻혀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배웠습니다. 조직은 개인의 시간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기에 자신의 시간을 잘 관리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고, 자기계발과 회사 업무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엉터리 회사는 개인이 일궈낸 성과보다는 개인이 회사에 투자한 시간에 대하여 보수를 지급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 내 어떤 이들을 지켜보며 회사를 이용하려는 생각보다 공동체 의식을 갖고 팀워크를 발휘하며 공동의 목표에 헌신하는 태도가 스스로에게 더욱 도움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제 팀장님의 경쟁 입찰 프리젠테이션을 지켜보며 프로다운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조직 생활에서의 의미만 발견한다면, 개인과 조직은 적대적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회사와 내가 유쾌하게 공생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여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이들에게 회사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삼십 대의 10년에는 이런 깨달음을 보다 단호하게 실천하여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조직에 있든, 그렇지 않든 저에게는 도움이 되는 배움이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스스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일해야 할 때라면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할 때라면 그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애정을 주고 싶습니다. 제게 어울리는 삶이 코끼리에서의 삶인지, 벼룩의 삶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여 살 것입니다. 2005년부터 조직에 바쳤던 열정만큼 이제 제 삶에 열정을 바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어떤 조직에 이 열정을 바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올지도 모르지요. 언제나 내 안의 열정을 의미 있는 곳에 바치고 싶습니다.
나에게 더 깊은 의미와 성과를 안겨다주는 가치들에게 나의 열정과 에너지를 바치고 싶습니다. 어떤 가치들이냐면, 성실과 변화 그리고 고결함과 진정성입니다. 성실은 타협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태도이고, 변화는 어제의 나와 결별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고결함은 원칙을 지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성품이고, 진정성은 믿는 것을 알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노력입니다. 이 가치들이 나의 삶 속에서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목표는 이루어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며, 비전도 이루어야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치는 지켜가는 과정만으로도 우리를 가치 있고 고결하게 만듭니다. 내 삶이 고결한 가치를 구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가치들을 열심히 추구한다면 저는 분명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치의 터널을 통과하여 다른 쪽 바깥으로 나가면 이전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의 내일이 희망적이며, 나의 오늘이 즐겁다는 사실에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여자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살짝 곁들인 채 말입니다.)

- 2007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