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어느 그윽한 만남

카잔 2016. 12. 12. 14:35

지난 주말이었다. 양평 다녀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 점심 때 시간 되세요? 진석 오빠도 휴가라서요.” 머릿속으로 다음 주 일정을 떠올려보았다. 화요일은 모 건축회사 인사팀과의 회의가 있는 날이다. “민지야 아마도 월요일이 될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운전 중이라 10~20분이면 도착하거든. 확인해서 연락할게.” 전화를 끊으면서 고마움에 젖어들었다. 휴가 때, 신랑 신부가 함께 선생을 찾아준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돌아와서 깜빡 잊었다가 저녁에 메시지를 보냈다. “월요일 점심을 함께 먹자. 장소는 너희 가족이 움직이기에 편한 곳으로 하시게. 내가 움직일게.” 30개월 남짓의 딸이 있는 데다 몸도 무거운 그녀였다. 반면 나는 몸 하나가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신랑과 상의하더니 회신이 왔다. “홍대나 합정 근처의 브런치 카페로 가요. 제가 그쪽에 안 간지 오래되어서 가고 싶어서요.” 합정동은 그녀가 20년 넘게 살던 곳이었다. “그러자. 장소는 내가 알아볼게.”

 

이틀 후, 내가 먼저 브런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핫한 카페여서인지 평일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부부를 알게 된지는 만 7년이 다 되었다. 둘은 내가 진행하는 학습 커뮤니티의 같은 기수로 만난 사이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처녀, 총각이었는데 일 년의 과정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부부가 되었다. 동기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으신 분이 결혼식 주례를 맡았고, 나는 하객으로 참석하여 부부의 연을 축하했다.

 

그 부부가 둘이서도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휴가에 나를 찾아준 것이다. 작은 마음의 보답이라도 하려고 신부와 신랑에게 어울리는 책을 골랐다. 한참 만에 고른 책이 안도현 시인이 가려 모은 시집 한 권, 재독철학자 한병철 선생의 책 한 권이었다. 부부가 주차 공간을 찾는 시간에 시집을 펼쳐 몇 편의 시를 읽었다. 황인숙의 경쾌한 시를 읽으며 웃었다. 정희성의 ‘태백산행’도 유쾌하게 지혜 한 수를 전했다. ‘내가 먼저 곱게 읽고 다음 만남 때 전할까’ 하고 생각될 정도로 찾아 읽은 시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갈등은 짧았다. 민지에게 어울리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곧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리코타치즈 샐러드, 오믈렛, 아메리카노 등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딸 아이 이야기, 재테크, 새로운 취미(자전거 타기)에 관해 말을 나눴다. 육아 얘기든 부동산을 비롯한 재테크 얘기든, 나는 편안하고 진솔하게 참여했다. 두 사람도 편안해 보였다. 카페는 시끄러웠다. 우리는 보이지 않은 유리 안에서 대화한 걸까. 대화가 은근했고 분위기는 아늑했다. 자기다움이 아닌 재테크 얘기를 늘어놓는 내가 어색했을까, 신랑이 이리 말했다. “많이 바뀌셨네요.” 부정적 뉘앙스가 아닌 놀라움의 어조였다. “나? 원래 이랬어.”

 

“그래도 표현하시진 않았으니까요. 표현을 하고 안 하고는 큰 차이일 테고요.” 생각이 남다른(대개의 경우 깊은) 그였다. 표현의 차이를 짚어내는 대목에서 지금도 여전하다고 느꼈다. “그렇지, 그때는 이런 얘긴 잘 안 했지.” 당시 우리의 공부 화두는 자기이해였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이해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로 우리의 재테크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자연스러웠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모두 우리의 중요한 삶이다. 세월은 그렇게 우리의 다양한 모습들을 서로에게 보여주도록 채근했다.

 

그들의 재정 상황은 양호했다.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의 가정생활이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다음 달에 태어날 둘째를 맞는 일에 염려가 없진 않았지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처럼 변화란 자연스럽다는 듯이 말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카페를 나왔다. 아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진석에게 말했다. “민지가 정말 오고 싶어했는지, 나를 배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멀리까지 와 주어 고맙다.”

 

우리는 연남동 골목길을 잠시 산책했다. 딸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가야 해서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다. 헤어지기 전에 준비한 두 권의 책을 건넸다. 작은 선물인데, 고맙단다. 내가 더 고마운데……. 두 사람과의 만남 덕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따뜻했다. 시끌벅적하지도, 배꼽 잡으며 웃지도 않은, 그윽한 만남이었다.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에 한 번 더 시간을 내어 만나자고 한 약속이, 내면이 힘겨운 요즘인데도 부담스럽지 않다.

 

한때는 내게 배운 이들이지만, 배움의 관계라는 것이 삶의 한 영역에서만 유효한 경우가 많다. 다른 영역에서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들이 많다. 오늘은 두 사람에게서, 인생의 선배를 찾아 함께 식사를 즐기는 삶의 여유를 배웠다. 이건 배움은 아니지만, 그들의 평온한 삶이 부럽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짧게라도 만나니 좋다. 서로 사는 얘기도 나누고, 덕분에 따뜻한 마음으로 남은 하루를 산다.”

 

책 선물 감사하다고, 종종 소식을 전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앞서도 말했지만, 휴가인데도 먼 길을 찾아와 주어 참 고맙다. 예전에도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마음이 진하다. 고맙고 또 고맙다. 요즘 내 마음이 매서운 겨울을 보내고 있기에 그런가 보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휑하니, 사소하고 작은 감정도 곧잘 자리를 잡는 걸까. 집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문득 떠오른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을 하염없이 듣고 싶은 날이다.

*

만남 이틀 후, 진석에게서 "연남동 조찬 모임을 마치고"라는 제목의 메일이 왔다. 긴 메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에 번개라는 가벼운 단어보다는 '조찬 모임'이라는 신문 제목에 나올 법한 단어를 선택해 보았습니다. 직전에 팀장님을 마지막으로 올해 신년회였고, 모임이 아닌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를 나눈 인도에 가기 전에 팀장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후로 처음이 아니었나 기억됩니다. 그런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다는 점에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세월에도 어색함 없는 만남을 가질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의 마음도 나와 비슷했음에 반가웠다. 그저께 만났던 장면을 돌아보니, 우리는 지난 주에 만난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만나, 악수를 했고, 자리에 낮아 커피와 브런치를 주문했다. 어색함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약속한 대로 조만간 뵙도록 하겠습니다"는 끝인사가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