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자유로운 단상노트

자기탐구 : 자책편

카잔 2017. 3. 15. 13:20

이것은 수업 후기가 아니다. 수업 후기로 시작한 글이지만, 개인적인 자기탐구가 되었다.


나는 자책하는 사람이다. 나를 설명하는 여러 단어가 있겠지만, 자책 또는 자괴감은 나를 이해하는 요긴한 단어다. 실로 자주 자책을 하니까.


어젯밤 나는 <문예사조로 일별하는 서양 문학의 역사>라는 다소 장황하고 복잡한 제목의 수업을 진행했다. 전체 4주 과정에서 어제가 두번째 시간이었다. 1주차는 흡족했지만, 어제 수업을 하고 나서는 괴로웠다. 강사로서 멋진 시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를 열심히 사느라 저녁 수업에는 피로감을 안고 참석하신 청중이 많다. 그들에게 배움이 가득한 수업은 피로 회복제다. 다른 말로 하면, 피로회복이 되어주지 못한 수업은 고스란히 피로감의 누적이 된다. 이튿날 아침, 나는 카톡 단체방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여러분, 굿모닝(!)입니다. ^^ / 어제 수업은 좀 산만했지요? 르네상스 문학에 집중하지 못했고, 진도도 마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문학보다는 문예사조에 치우쳐 딱딱한 수업이었고요. 어렵다고 느끼셨다면 그건 문예사조의 무용함이나 여러분의 피곤함 때문이 아니라 제 교수법의 불찰 때문일 겁니다. 자조 없이 자책도 없이 선언합니다. ^^ 3주차 수업은 이 지경은 아닐 거라고. 하하하하. / 2주차까지는 문예사조의 큰 흐름을 정리해보자는 생각이었고 3, 4주차에는 작품으로 풀어가자는 의도였는데, 분명 제 교수법이 아쉬운 어제의 수업입니다. ^^"


사실 자책거리는 한없이 길었지만, 대폭 걷어내고 덜어냈다. 와우리더를 하면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리더가 자책에 오래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자만에 빠져 있는 리더나 자책에 빠져 있는 리더나 서로 다른 양극단의 오류를 범하는 것에 불과했다. 자만과 자책은 자기중심성이라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다.


나는 자책 대신 대안과 비전에 초점을 두려고 노력해야 하는 리더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는 자괴감에 빠져 있게 된다. 자책에 빠져 있다 보면, 잘 해낸 점을 간과하기 일쑤다. 내 눈에는 잘한 점보다 잘못한 점이 크게 보이지만, 잘한 점도 놓치지 말아야 전체적인 사기 저하를 막을 수 있다. 개인의 자책은 팀의 사기보다 중요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메시지는 자괴감 자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메시지다.


"사나흘에 걸쳐 하루에 하나씩 F-up 톡을 올리겠습니다."


"[오늘의 F-up] 책의 목차만 훑는 느낌이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작가를 알아두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드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훅훅 지나간 풍광들이 아쉬울 때가 있지만, 목적지에 당도하면 왜 우리가 이리 빨리 달렸는지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저는 4주에 걸쳐 문예사조의 큰 흐름을 잡기 위해 종횡무진 하는 중입니다. 우왕좌왕으로 느껴지더라도, 저와 함께 4주간 동안만 달려 봅시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작가와 사상의 큰 흐름은 인문 독서의 기본기가 될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찰스 반 도렌의 <지식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시간 나실 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름만 하는 작가들 덕분에 좀 더 수월하게 읽힐 겁니다. (그나저나 수월하게 읽히지 않으시면, 큰 일인데... ㅋㅋㅋㅋ)"



지난 일에 대한 지나친 자책이 아닌 수습과 비전에 집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자책은 괴로움을 동반하지만, 멋진 결실을 낳기도 한다. 더 많은 노력, 주도성 발휘에서 특히 그렇다. 모든 문제는 자신과 외부의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외부의 문제를 간과하는 점은 '자책하는 나'에겐 주의사항이다.


강연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썼다. 이는 카톡에 공유하지 않았다. 강사 개인에게는 중요한 성찰일지라도 청중에게는 불필요한 내용이라는 판단에서다. 몇몇 문장을 안기면 좋을 텐데, 어느 것이 도움 되고 어느 문자이 불필요한지 판단하기 힘들어 통째로 제외됐다.


<나의 판단미스들>

- 처음 오신 분들을 위한 배려로 15분 가량이나 복습에 할애한 것은 지나쳤다. 첫 참석자 분께는 좀 낯설더라도 해당 수업에 집중하여 그 날의 주제를 갈무리했어야 했다! 하루 참석자 신청에 동의하면서(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한 강좌가 온전히 독립적이면서도 4주가 구슬처럼 꿰어지는 수업을 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 문예사조 정리(1,2주)와 작품 들여다보기(3,4주)를 나눠서 진행한 것도 착오였다. 개념 설명은 딱딱하니 사례와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 (르네상스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나 근대의 합리적 이성을 설명한 것처럼.)


- 4주차 수업에 비하면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욕심도 컸다. 이 역시 뿌리 깊은 자기폄하의 발로다. 적잖은 수업료에 걸맞은 양질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판단에 너무 꽉꽉 눌러 담았다. 청중의 기대성과를 생각했어야 했다! 이미 여러 차례의 수업에 흡족해하신 청중들의 평가도 나의 자기인식에 반영해야 하고.


- 2주차 수업은 종횡무진과 우왕좌왕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선 강연이었다. 어떤 분께는 종횡무진 개념정리가 도움이 되었고, 어떤 분께는 우왕좌왕 혼란스러운 내용이었다는 상반된 평가였다. 여느 때처럼 유인물 내용을 고스란히 설명했더라면 보다 긍정적인 수업이었을 텐데! 하나의 주제를 마쳤다는 성취감도 들 테고.


개인톡으로 전해온 메시지를 보니, '폭망'한 수업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희열 - 선전 - 선방 - 폭망. 나는 이 네 가지 단어로 나의 강연을 자평한다. 뒤로 갈수록 괴로움이 커진다. 어제 강연은 선방이거나, 선전과 선방 사이에 자리매김하리라. 이 평가마저도 자책일까. 모르겠다. 나는 정말 그리 느껴지는 걸! 자책이나 자기폄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자기반성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