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앙이 다가온다면 당신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1922년, 파리의 저명한 신문이 여러 인사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신고 기고에 열정적이었던 당대의 저명한 어느 작가는 긴 회신을 보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은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 거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지! 언젠가 할 거라는 확신으로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진실을 숨겨 버립니다. 만약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협이 생기면 세상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 대재앙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갤러리를 방문하고, 그녀의 발치에 몸을 던지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텐데요. 실제로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일상적인 마음가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테니까요. 무신경이 소망을 죽입니다. 현재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우리는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죽음이 당장 오늘 밤에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회신의 주인공은 당대부터 불후의 명성을 떨친 작가다. 그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못했지만(“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1913년 제1권이 출간된 그의 소설을 두고 한 프랑스 평자는 그를 셰익스피어와 비교했고, 어느 이탈리아 비평가는 스탕달에 비유했으며, 오스트리아 공주는 그에게 청혼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마르셀 프루스트 얘기다.
프루스트의 답변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기는 갑작스러운 삶에 대한 애착’을 적절한 예시와 간결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뒤늦은 애착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터! 나에게는 이사가 그렇다. 3~4년마다 이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살던 곳을 향한 뒤늦은 애정이 샘솟는다(‘아직 이 동네를 잘 모르고, 못 가본 곳들도 많은데…’).
즐길 수 있을 때는 무관심했다가 느즈막이 애착이 찾아오는 것은 왜일까? 매번 경험하는 이 뒤늦은 자각을 언젠가부터 '이사의 딜레마'라고 불렀다. 떠날 무렵 생긴 애착 때문에 떠나지 않기도 어려우니 그때마다 제법 묵직한 딜레마를 느끼곤 했다.
여행의 딜레마도 마찬가지다. 줄곧 머물 땐 느끼지 못했던 여행지에 대한 애착을 떠날 무렵에야 절절히 느끼는 현상 말이다. 그럴 때마다 20대의 나는 기만적인 위로를 건넸었다. ‘다음에 또 여행 오면 되지!’ 신중한 계획으로 꺼낸 말이 아니다. 순간의 아쉬움을 달래는 감정적인 반응이다. 이것이 왜 기만적인가?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향유하는 감각이 눈에 띄지 않게 시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날을 기대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시나브로 무관심하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나는 서른 무렵에야 여행의 딜레마에서 벗어났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지 않는 법을 익힌 것이다. ‘이번 생에는 다시 오지 않을 곳이야. 이곳을 여행할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인 거야.’ 이러한 생각이 온 몸의 세포를 깨웠다. 눈앞의 풍경에 천연색을 더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존의 감각이 깨어났다.
"무신경함이 소망을 죽입니다(Negligence deadens desire)." 프루스트의 이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무신경함이란 감각이나 느낌이 둔해져 눈앞의 슬픔과 기쁨을, 분노와 감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다. 무신경한 이들은 삶의 경이를 무신경하게 지나친다. 눈이 있어도 눈이 먼 자들이다. 실제로 시각 장애인들은 여느 사람들보다 섬세한 감각과 주의력을 지녔다. 해외 여행을 다녀온 시각 장애인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공기가 다르고 들리는 소리가 다르고 거리의 냄새가 다르다고 하더라. 보이는 데도 아무 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감각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흘러간 세월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눈앞의 세월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무신경함을 직시한다면,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습관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성찰한다면, 우리 눈앞의 장소와 스쳐가는 현재가 달리 보일까? 혹은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가능성에 도전할 한 줌의 용기를 얻진 않을까? 나의 경우는 분명 그렇다. 세상이 조금은 달리 보였다.
죽음의 위협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How to love life today)"이라고 알랭 드 보통은 썼다. 내게는 이사의 딜레마, 인간의 필멸성, 여행의 딜레마를 고찰하는 일도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삶이 당장 종료되거나 지구가 멸망하지 않아도 현재를 사랑하는 길이 존재하는 셈이다. 우리 모두는 필멸자다.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이 동네에서, 이 세계에서 떠나야 한다. 이를 절감할 때마다, 삶의 우선순위를 성찰하면서 조금씩 일상을 재편하게 된다.
다음번 이사 때나 언젠가 지구를 떠날 때나 그간 살았던 곳에 대한 애착은 여전하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야 '이리도 매혹적인 곳이었구나' 하는 후회만큼은 줄여보고 싶다. 머무는 곳마다 한껏 음미하며 살고픈 이유다. 누군가 곁에 있다면, 술잔이라도 부딪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모두 브라보! '머나먼 거기'가 아니라 '바로 이곳'의 매혹과 지금의 희열을 만끽하기 위하여. (201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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