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강연 Follow-up

어느 무더운 날의 강연일지

카잔 2010. 6. 10. 14:57

6월 9일, 숭실대학교에서의 교양강좌 <진로탐색>의
마지막 강연을 진행하러 가는 길이었다.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디까지 오셨어요?"
강연 담당 선생님의 친절한 인사 전화다. ^^

"네 지금 정문 지나고 있습니다." "더우니까 천천히 걸어 오세요."
"그렇잖아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지요. ^^ 
6월치고는 더운 날이었다. 어슬렁 걸어도 살짝 땀이 맺힐 듯한 정도로.

'대학생의 자기경영'이라는 자유로운 주제의 강연이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나는 강의장 맨 뒷쪽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내 앞에 있던 학생 둘이서 대화를 나눈다.
강사가 뒷자리에 있는 줄 모른다. ^^

"야, 오늘이 종강이래." "알아."
"가자. 3번까지는 괜찮잖아." "지금?"
"응, 교수님이 3번까지는 정말 아무런 상관없다고 했어."

그들은 갔다. '결석 3회 허용'의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학생들에게 내 강연이 주는 의미를 가늠해 보는 좋은 대화였다.
그들은 오늘 강사가 누구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음에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앉아 있는 학생들이 고마웠다.

강의를 시작하려고 강단으로 나갔다.
담당 선생님이 가까이 오셔서 말했다.
"오늘은 마지막 강연이어서 학생들이 많이 잘지도 몰라요.
안 들어온 학생도 있을 거예요. 늘 이런 마지막 강연을 부탁드려서 항상 죄송해요."

"평가도 다 끝났겠네요?"
"네."

즐겁게 웃었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청중의 참여도는 어차피 강사에게 달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항상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진심으로 미안해 하시는 마음이 고마웠다.
담당 선생님은 이미 여러 차례 만나왔지만,
늘 신경 써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적극 지원해 주신다.

그러나, 나의 자신감은 허당이었다.
강연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잤다. 잘도 잤다. ^^
꽤 잘 진행했지만 끝내 잠들었던 학생들을 깨우는 수준의 강의는 아니었다.
강의 끝날 무렵, 잠자는 인원을 헤아렸다. 19명이었다.
15%에 가까운 숫자였다. 헉, 이렇게 많은 학생들을 재우다니.

이것은 나를 자책하는 마음이 아니다. 
잠든 학생들을 기억하리라는 소심함도 아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더욱 온전하게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몇 명의 열정적인 경청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책임의식이었다.

다행히도 강연 막바지로 갈수록 잠자는 학생이 줄어들었다.
그것은 나의 공(供)이 아니라, 시간의 공(供)이었다.
한창 나른한 오후 기간이 지나가고 있었던 게다.

강연이 끝났다. 힘들지 않았다.
수백명의 대중 강연 때, 청중을 휘어잡을 강의력이 아직 내겐 없음을 안다.
또한 집중해 주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법도 안다.
다만 아쉬웠다. 더 나은 강연으로 그들을 돕지 못함에.

어쩌면 힘들었는 데도
이 정도의 힘듦은 힘들다고 느껴지 않은지도 몰랐다.
어차피 삶은 힘겨운 것이니 당연하다고 느끼는지도.
그래서 안 힘들 때면, 청중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지도.

어쨌든, 다음 학기 나의 경쟁상대가 분명해졌다. 학생들의 졸음!
시험 기간 중에 있으니 밤새 시험 준비를 하느라 피곤할 터이고,
성적 평가가 모두 반영된 후의 강연이니 그들을 유인할 꺼리 하나를 잃은 것이다.

도전할 만한 일이다. 그들을 좋은 강연으로 사로잡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새, 2010년 나의 모든 강연을 '탁월함' 수준으로 준비하자는
다짐과 실천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스물스물 연기처럼 사라진 다짐을 다시 불러 들여야겠다.

나의 강점은 주어진 시간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노력했고, 정성을 기울였고, 진심을 전했다.
잠을 재우긴 했지만 스스로가 괴롭진 않았다.

즐겁게 식사를 하러 갔다. 학생식당이었다.
늘 담당 선생님과 함께 가다가 처음으로 홀로 가게 된 날이다.
두리번 거리는 나를 보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방금 강의 들은 학생입니다."
식권을 들고 초보자다운 방황을 하는 내게
그는 친절하게 밥 타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름이 희규라 했다. 세상에는 이렇게 고마운 이들이 많다.

저녁식사 후에 진행된 두 시간짜리 특강은 잘 진행되었다.
그것은 학생들이 잘 들어 주었던 덕분이다.
그 중에서도 몇몇 학생이 몸을 앞쪽으로 내밀어
반짝이는 눈으로 참 열심히 들어 주었다.
그네들의 눈을 보면 나도 열심을 내게 된다. 고마웠다.

강연이 끝나고, 모두가 강의장을 나갔을 무렵
나는 가방을 싸고 있는 한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늘 강연을 가장 열심히 경청해 준 학생 중 한 명이다.

"고맙다. 오늘 강연 열심히 들어주어서 고마워서 말야."
그는 수줍게 웃었고, 나는 이름을 물었다. 아쉽게도 잊었다.
좋은 강연은 이런 열정적인 학생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둘째 강연 마지막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번 강연에 만족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잘 들어주신 덕분입니다.
그런 정열과 열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오는 길, 조금 피곤했다.
나도 모르게 집중을 하고 에너지를 썼나 보다.
그래도 흐뭇한 하루였다. 오늘 만난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해 본다.

'그대들의 열정과 젊음에 비하면 졸강이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들어주어 기쁘고 참 감사하다네.
그대들의 꿈을 실현하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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