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사회의 소수자를 향한 '반짝' 관심

카잔 2010. 12. 5. 21:43


초능력자

★★★


영화의 전반부, 아이가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어지는 장면, 어미에게 해코지를 하는 모습도 다소 무서웠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이후엔 다시 그런 장면이 반복되지 않은 것이 내게 숨통을 터 주었다. 영화는 선량한 세 남자, 임규남(고수 분)과 그의 직장 동생들이 등장하면서 밝아진다. 규남은 가진 것 없는 블루컬러 노동자로서 착하고 정의로운 사나이다. 규남을 따르는 두 동생은 외국인 노동자다. 이들 역시 사회의 약자로 지내지만, 선의로 가득한 인물들이다.


별점이 인색한 것은 영화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숨어버린 듯하고, 그래서 결말이 다소 엉성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 중 일부는 엔딩 장면에 대해 "이게 뭐야?"라는 식의 황당함이었다. 나 역시 잠시 영화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물론, 모든 영화가 교훈적일 필요는 없지만 나는 이렇듯 나에게 주는 어떤 메시지를 찾는 편이다.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영화의 흠집을 좀 더 잡아보련다. 나는 초인(강동원 분)이 범죄할 때마다 답답했다. 초능력에 의해 세상이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초인의 범죄 장면이 그대로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경찰에게 넘어갔을 때에는 '이제 됐다' 싶었는데, 테이프의 행방은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묘연해진다. 이 점은 납득하기 힘들었고, 규남이 총알을 2방 맞고도 꿋꿋이 목숨을 이어가는 불사조의 주인공 모습을 보인 것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교훈은 있다. 영화는 '다름(Difference)'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초인은 자신이 남들과 달라서 오는 힘겨움을 여러 번 토로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배척당하거나 차별을 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눈은 말한다. 당신은 틀렸다고. 혹은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해서 그럴 거겠지, 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와 다른 사람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폭력적인 시선도 있다.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나라도 점점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외국인 노동자도 많이 늘었다. 한국 영화 <의형제>와 <초능력자>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등장했는데, 사회의 변화상을 느낄 수 있었다. 소수자를 존중하는 문제는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다수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
는 여러 소수자를 등장시킨다.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하고, 장애인이 등장한다. 2010년 부로, 우리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는 50만명을 넘었고, 결혼하는 10쌍 중 한 쌍은 국제결혼이라고 한다. 분명 소수자들이지만, 적은 숫치는 아니다. 절대적인 소수자는 주인공 초인(강동원 분)이다. 그는 단 한 명,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영화가 전개되는 줄곧 가해자로만 보였던 그가 약자와 소외받은 자로 느껴진 것은 영화의 결말에서였다. 초인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힘겨워했고,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는 초인이기도 했지만, 소외받은 자, 사회가 부를 이름이 없는 자이기도 했다.


규남은 초인의 초능력에 조종당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규남의 정의로운 활약을 알고 있는 사람은 초인 뿐,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초인이 규남의 추격을 방해하기 위해, 어느 여성의 아이를 달려오는 지하철을 향해 내던지는 장면이 있다. 규남은 아기의 목숨을 가까스로 건져냈다. 물론 여기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은 초인의 초능력에 의해 멈춰 있다. 규남의 정의로운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은 초능력에서 풀려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아기는 살았고, 규남은 피를 철철 흘리는 중상을 입는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규남은 장애인이 된다. 건강하던 신체를 가졌던 규남을 누군가를 돕다가 장애인이 된 것이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분들은 혹시 우리를 구하려다 모두 지금의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들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물론 과대망상일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걷다가 좀처럼 장애인을 만나볼 수 없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들의 눈이 권력과 이익만을 중시하는 눈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중국의 실천적 지식인 류짜이푸의 한탄이 떠오른다.

"세계의 눈이 과학기술로 무장된 이후에는 천리 밖이나 만리 밖까지, 심지어는 억만 광년 밖까지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눈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반짝거렸지만, 아쉽게도 이 두 눈은 끊임없이 고층 건물이나 만리장천을 보았을 뿐 사회의 하층은 보지 않았다. (중략) 기자의 카메라는 지도자, 부호 및 유명 인사를 추적하지만 가난한 산촌과 갱내(坑內)로 카메라 렌즈를 돌리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영화 <초능력자>는 내게,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영화였다. 나의 관심도 '반짝'일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 모두는 비장애인이 아니라, 예비 장애인이라는 어느 사회복지사의 말을 곱씹어 본다. 시민단체 활동이라고 하나 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시들해질 마음일 것만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