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나는 두 사람을 미워했다

카잔 2011. 6. 26. 13:11

나는 그녀가 미웠다. 같은 공간에 있을 때에는 나의 온 몸이 그녀를 밀쳐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가 말할 때에는 말을 섞는 게 싫어서 침묵했다. 그녀는 말이 앞서는 사람, 과장되이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싫어하는 이유가 한 가지씩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를 싫어했다. 그녀와의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싫었으니까.

그녀는 교회 선배였다. 만나지 않으려고 해도 매주 한 두 번씩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녀와 말을 나누고 나면 기분이 나빠졌고, 회의라도 함께 하게 되면 에너지가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나를 지치게 하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는데 쓰일 에너지가 추한 일에 소모되고 있었다. 내 삶이 힘차게 전진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기 때문이었다. 

미움의 대상은 또 있었다. 나의 새아버지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가 술에 취하신 날이면 어머니도, 나도 매를 맞곤 했다. 그는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어머니는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는 남편 대신,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워 음료 배달을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학교에서 그 소식을 들었던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살아만 주시라고. 그날 밤 어머니 소식을 모른 채로 울다가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고를 당한 즉시 돌아가셨다고 했다. 1992년 4월 3일, 햇살이 따뜻한 봄날이었다. 병원에 가는 길에 문득 문득 눈에 들어온 하늘이 노랗게 보이다가도 시커먼 반점이 생기곤 했다. 나는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그 때 나는, 성인이 되어 힘이 생기면 아버지를 해코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듣는 것도 싫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에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흥분하곤 했다. 친구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내 표정이 굳어지고 원인 모를 분노가 가슴 속에 일어났었다. 급기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면, 씩씩 대며 그만 하자고 말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자기네들 '아버지' 이야기인데도 그랬다. 미움과 복수의 마음이 나를 압도하였던 것이리라.

다행스럽게도 열다섯 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만나야만 할 일이 생겼다. 법적인 문제였고, 만나야 해결되는 일이었다.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용서를 결심하고 아버지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떨리긴 했지만, 미움의 감정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버지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없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생각과 마음으로는 용서하려 했지만, 몸과 삶으로는 용서를 거부했다. 보복의 감정까지는 아니었지만 원망과 미움이 남아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만나기 싫어서 많이 울었지만 만남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었다.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모든 실재에 "YES"라고 화답한다. 나는 내 인생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용서는 아버지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용서 받은 사람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몇 주 후,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다. 두 번째 시도의 결과는 좋았다. 용서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제 지난 일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지난날의 아버지 모습을 용서합니다. 아버지가 새로운 삶을 사시는 데 과거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정작 이 말은 못했고 많은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할 말이 많지 않았다), 필요한 말은 하고 돌아왔다.

'용서'라는 단어가 내 영혼에 깊이 새겨진 날이었다. 그 후로는 '아버지'를 주제로 한 대화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풀어주고 나니,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더 힘차게 살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 원수를 용서한다고 하여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노, 미움 같은 감정에 자기 인생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용서한 즈음부터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용서'라는 단어가 나를 집어들어 지금까지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대로였지만, 내면이 새로워져 그들이 다르게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교회 선배를 미워했던 것도 아버지를 용서한 사건 이후의 일이다. 분명한 것은 용서의 힘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과거로부터 나를 자유케 했다.

선배에 대한 미움을 지우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사실, 내게 잘못한 일도 없으니 용서한다는 표현도 민망하다. 내게 실수 몇 번을 했지만 '용서'를 거론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용서와 비슷한 감정적 수용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선배를 자주 보지 못하게 되었다. 눈에서 멀어졌기 때문인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노력 덕분인지, 선배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를 못 뵌 지도, 그녀를 못 만나지도 십 수 년이 지났다. 나는 '용서의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만, '용서의 힘'을 체험하고 절절히 느낀 사람이다. 선배 이후로, 미워하는 사람 없이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소모하지 않고 생산적인 일에만 투자할 수 있는 까닭이다. 자기계발서에서는 '용서'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힘에서 용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용서의 힘은 여느 자기경영의 노하우보다 강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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