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어느 성탄절날의 4가지 질문

카잔 2011. 12. 25. 22:11

성탄절 밤이다. 사람들은 성탄절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이 날을 보낼까? 산타 클로스는 아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다.) 예수 믿자는 말은 아니다. 불신 지옥이라고 덧붙이기는 더욱 싫다. 하루 하루를 음미하며 사는 것, 중요하다. 어떤 하루는 의미가 깊다. 광복절이 그렇고, 자기 생일이 그렇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자는 글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성탄절을 보낼까, 를 생각하다가 '나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를 잠시 들여다 보고 쓴 글이다. 나의 하루 역시 예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고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펼친 까닭이다. 내년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은 좀 더 하루를 잘 음미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성탄절 밤, '한 시간 동안의 나'를 관찰하고 난, 성탄절과는 무관한 생각들이다.
 
1. 창 밖을 내다본다. 사거리 교차로가 보인다. 좌회전 신호가 거의 끝날 무렵, 저만치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온다. 속도를 죽이지 않고 부채살을 그리듯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운전자는 관성을 오롯이 느꼈을 법한 속도다. 그는 어디로 달려가는 것일까?

'어디'가 아느라 그저 집으로 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여유보다는 조바심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일지도. 그리고 어쩌면, 크리스마스 밤을 홀로 집 안에서 보내는 것이 아쉬운 이가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거리를 지나가는 수 많은 차량 중에 몇 대는 쓸쓸한 밤을 달래기 위해 술을 찾아, 친구를 찾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집에 있다가 목적지를 억지로 만들어, 길을 나서는 발걸음은 쓸쓸하다. 사람이 그리워 나선 것일까? 쓸쓸함을 뒤로 하고 싶어 나선 걸까? 비슷한 감정이니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혼자 사는 즐거움을 누리는 나도 오늘 밤은 좀 쓸쓸하다. 오랜만이군. 이 감정. 왠지 반갑다. 생각하기에 좋은 감정이라 그런가 보다. 사람들은 언제 쓸쓸함을 느낄까? 그리고 쓸쓸함을 어떻게 달랠까?

2. 고백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들어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았던 것이 괴롭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고백은 좌회전 할 때, 자주 생각나는 일이다. 자주, 라는 말은 중요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설명하는 것일테니까. 중요한 것이니 한 번쯤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짧게! 쓰련다. 어떤 생각은 쓸쓸하지 않을 때 해야 한다.

나는 좌회전 할 때 종종, '엄마'를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어머니라 부르겠지만, 열 다섯 중학생인 내게는 아직 엄마였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음료 배달을 하셨다. 4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 엄마는 좌회전을 하다가 오토바이 핸들이 트럭에 부딪혀 넘어지셨다. 엄마의 몸은 트럭으로 들어갔고, 트럭의 바퀴는 엄마를 피하지 못했다.

좌회전은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단어다. 평생 어머니와 함께 붙어다니는 단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트라우마인가? 누구나 저마다 가슴 속에 아픈 상처 혹은 지독한 슬픔 하나씩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걸까? 화해했을까? 외면하고 있는 걸까? 달라진 일상에 익숙해져가더라도 한 번씩 가슴이 아플 텐데 말이다.

3. 교차로를 20 미터 정도 앞두고 승용차 한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켜 둔 채로 길 가에 서 있다. 우회전 하려던 차량은 비켜가야 했다. 차선을 따라오던 차량들은 아주 작고 가벼운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나는 잠시 상상한다. 어떤 운전자가 불법 정차한 차량의 운전자에게 화를 내는 장면을. "뭐 하는 거예요? 사람 불편하게시리. 어서 차 빼세요."

잠시 후, 비상 깜빡이 차량이 출발할 때까지 그런 상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불평하기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것이 편하고 쉽다. 잠시 핸들을 돌리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차량 때문에 차가 밀린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역시! 세상엔 경우 바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라고, 적은 정보로 성급하게 결론 짓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편협하게 단정짓지 않고 다각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4. 할 일이 없으면 쓸데 없는 생각을 한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 말은 환경이나 상황의 영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할 일이 있든 없든, 제대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부분적 부정은 부분적 동의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있긴 하나, 하기 싫어하는(?) 중이다. 일을 미루다 보니, 쓸데 없는 생각이 든다. 

오늘 밤은 친구를 만나 커피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누고 싶은 날이다. 친구를 만나는 게 왜 쓸데없는 생각이냐고? 친구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멀다. 가장 친한 친구는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야 한다. 또한 삼십대를 넘어선 후의 대화는 곧잘 이상적이기보다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동네 친구, 인생의 고단함을 모르던 날의 친구가 그리운 게다.

커피 한 잔이든, 술잔과 알탕이든 상관 없다. 대화 상대가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라면 말이다. 물론, 삶의 힘겨움을 쏙 빼낸 죽은 대화는 싫다. 다만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생의 에너지와 비전은 살아 숨쉴 수 있으니, 대화를 하고 나면 힘이 나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 사람들은 그런 친구와 얼마나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살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컨설턴트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