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알 수 없는 것들

카잔 2013. 2. 14. 23:43

 

알 수 없는 것들

 

친구의 아내가 사망했다. 친구는 슬플까? 후련할까? 망자를 두고 이런 질문을 던진 나는, 매정한 걸까? 무심한 걸까? 아니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괜히 이런 질문을 두고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친구가 "그년! 차라리 어디 가서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 떠올라서 그런다. 

 

친구와 아내는 많이도 싸웠다. 나를 찾는 전화 중에 가장 진절머리 나는 전화가 녀석이 싸운 후에 거는 전화다. 이런 말을 하고 나니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진절머리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아 준 것을 우정이라 생각해 주면 좋겠다.

 

둘은 서로를 구속하고 속박하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다가도, 밤이 되면 달라진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좋은 일이다. 성취에도, 고통의 망각에도. (일시적인 망각이겠지만.)

 

하지만 그들의 관계에 벌어진 틈은 정욕 하나 만으로 메꾸기에는 너무 커졌다. 혹자는 이리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당신이 아직 결혼을 안 해서 그리 생각하는 거라고. 부부 사이에 잠자리가 좋으면 관계가 좋아질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이리 대답하고 싶다. 그건 당신이 인생을 너무 일반화시켜서 생각하는 거라고. 여기 속궁합은 무지 좋은데, 헤어지고 싶어 안달이 난 한 남자가 있다고. 그런데 내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친구는 왜 그녀를 만났을까? 사랑 때문일까? 욕정 때문일까? 속궁합은 기가 막히게 잘 맞다고 하니 말이다.

 

내가 봐도 순진한 질문이다. 사랑으로 만나더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 사랑은 변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렇다. 그래서 숱한 작가들과 현자들은 사랑의 일차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사랑의 조건 혹은 기술을 덧붙여 두었다.

 

에리히 프롬은 '의지'를, 스캇 펙은 '현명한 지각'을 강조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유럽의 어느 학자는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했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네 일반인들도 감정만으로는 사랑을 하기가 역부족임을 알고 존중, 배려와 같은 가치를 첨가시키곤 한다.

 

나는 이제 알겠다. 이렇게나 중요한 가치들, 하지만 내 것으로 만들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가치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의 진짜 힘겨움들은 결혼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결혼생활의 힘겨움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알고 있긴 했다. 다만, 결혼도 안 한 녀석이 뭘 알아, 하는 시선이 싫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게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다. 결혼을 하면 뭐가 좋고, 뭐가 좋고, 뭐가 좋고 하며 결혼의 유익을 손꼽는 것은 헛수고다. 뭐가 힘들고, 뭐가 힘들고, 뭐가 힘들고 하며 결혼의 힘겨움을 함께 따지면 또 모를까.

 

그렇다고 내가 결혼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도 아니다. 고종석의 말처럼, 결혼은 공정한 제도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남녀 관계에서도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을 경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잘 생기고, 돈 많고, 인격도 좋은 이에게 파트너가 몰리지 않을까? 그런데 결혼 덕분에 우리는 일대일로 매칭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공정한가.

 

물론 공정함이 만사를 해결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공정함은 본능 앞에 무력하다. 지금 이 시각, 전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혼외정사가 일어나고 있을까? 혼외정사가 결혼 제도의 산물이라는 말이 아니라, 결혼 제도가 비본성적인 제도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혼에는 책임과 의무, 사랑과 의지 등의 가치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한겨레21>에서 한국인의 성생활을 분석 취재한 기사를 보고 크게 놀라지 않았다. (거기에는 한국인 남성들의 외도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도 있었다.) 세상을 리얼리즘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나와 마찬가지로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등의 세계문학을 탐독하여 세상을 조금 알게 된 이들도 마찬가지고, 굳이 세계문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빅 픽처』 등의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소설을 생각하며 읽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불륜이 많다.

 

친구가 왜 결혼했을까, 를 고민하다가 결혼 제도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과 불륜의 현실로 빠져버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의 결혼관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리로 빠져버렸을 뿐이다. 아마도 친구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다보니 다툼과 오해가 난무한 불행한 생활로 빠졌버렸을 뿐이었던 건 아닐까.

 

그런데 친구의 아내가 죽었다. 친구는 아내가 자신에게 불행을 안기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옳은지는 금방 드러날 것이다. 앞으로의 삶에서 친구가 여전히 불행하다면 친구의 생각은 틀린 것이 될 테니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아내가 이 세상을 떠났으니, 친구는 지금 행복할까? 행복하다면, 장례식장에서 친구는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까?

 

친구의 표정이 궁금하다면, 글의 제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게 좋겠다. 제목에 해당되는 목록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서부터 우리의 미래에 관한 것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와 같은 심오한 질문까지. 오래전에 즐겨 부르던 유행가 가사가 떠오른다.

 

"결혼이 무엇인지 사는게 무엇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몇년이 지난 후에 후회하지는 않겠지 알 수 없는 거잖아
살아본 사람들은 이렇게 얘길 하지 후회하는 거라고
하지만 둘이 아닌 혼자서 살아간다면 더욱 후회한다고"

 

사는 게 뭔지. 노래의 제목이다. 이 노래도 '알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포함해야겠다.

 

이 한 마디는 덧붙여 두고 싶다. 사는 게 뭔지, 결혼이 뭔지와 같은 삶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에도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밥을 먹어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식솔을 돌봐야 한다. 인생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알고 있는 것들도 더러 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알고 있는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주고 나서야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탐구를 할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 소설습작. 2013.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