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어버이날을 맞은 어느 아이

카잔 2013. 5. 8. 11:46

 

 

아이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그래도 잘 자랐다. 학창시절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나쁜 짓을 하며 지내지는 않았다. 운좋게 지방의 국립대에 입학했고, 읽고 싶은 책과 벗하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대학 졸업을 하지 못했음에도 작은 교육회사에 입사했다. 역시 좋은 운 덕분이었다. 탁월한 재주를 가지진 못했지만, 형편없이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먹고 살만하게 지냈다.

 

어떤 이는 (이젠 성인이 된) 아이를 대견하게 보았다. 아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이 대견한 걸까? 열심 때문이라면,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의 힘겨움을 딛고 일어선 것을 두고 대견하다 한 것이라면,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힘겨움을 딛고 일어선 적도, 고통을 이겨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생각했다. 부모님을 여읜 슬픔과 힘겨움을 이겨낸 적은 없고 그저 함께 지내온 것 뿐이라고.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결국 흘러넘친다. 컵에 담을 수 있는 용랑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살다가 겪는 힘겨움도 마찬가지다. 삶이 자기 주인에게 엄청난 힘겨움을 안기면, 결국 흘러넘친다. 주인이 감당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별과 같은 엄청난 고통과 슬픔은 단박에 모두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삶 이곳저곳에 넘쳐난 힘겨움을 조금씩 느껴가는 것이다.

 

넘치도록 힘겨움을 줄 때, 삶은 잔인하다. 삶은 자기 주인이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지 않고 무턱대고 힘겨움을 안긴다. 주문하지도 않은 물건을 배달하는 택배기사 같다. 젊은 아낙에게서 남편을 앗아가거나, 나약한 이에게 엄청난 실패를 안긴다. 삶은 아이에게도 한때 잔인했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아이의 힘겨움도 시간과 함께 지나갔다.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고, 아이는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어버이 날, 아이는 생전의 부모님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컸다고. 아이는 다시 생각했다. 자신의 무엇을 두고 대견해하는지에 대하여. 아이는 자신의 물컵 이론을 생각하며 결론을 내렸다.

 

사별과 같은 고통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로 온다. 힘들다고 해서 달아날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숙명으로부터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그저 숙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부모님을 여의고서도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은 견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피할 곳이 없어서 살았던 것 뿐이다. 숙명은 선택과는 무관한 단어다. (아이는 죽지 못해서 산다는 어른들의 푸념을 명랑하게 이해했다.)

 

숙명은 저마다 다르다. 아이는 자신의 숙명이 남들과 조금 다른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명랑이다. 태어난 땅을 불평하지 않으면서도 빛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는 나무 같은 명랑. 아이는 커서 선생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관계란, 우연으로 만난 이들과 필연을 만들어가는 정성입니다. 인생이란 숙명의 터 위에서 자유의 집을 짓는 노력입니다. 받아들이는 지혜, 창조하는 기술. 바다 같은 당신, 예술하는 인생!

 

- 영화 <투혼>을 보고 생각하다가, 어버이날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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