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명저 이야기

고통이여, 오라! 끌어안아 주리니

카잔 2013. 5. 24. 23:16


고통이여, 오라! 끌어안아 주리니.

-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살아야 하는 이유! 제목에 이끌려서 읽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가져서 우울한 것도 아니고, 삶을 놓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것도 아닙니다. 나는 신이 주신 삶을 감사해하며 명랑하게 살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되어 답답함으로 집어든 책입니다. 인생에 대한 무상함이 삶의 의욕과 소망을 짓누르고 있는 요즘이거든요.

 

무상함 혹은 허망함! 지난 달, 존경하는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에 나를 지배하는 감정입니다. 살면서 힘든 일을 피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소중한 이와의 사별은 여느 힘든 일과는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렵니다.   


좋은 리더가 되는 것은 나의 꿈입니다. 조직의 리더로서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할 때에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때의 힘듦은 그들을 향한 미안함이기에 극도의 절망적인 상황이나 허무감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고, 좀 더 나은 리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별은 슬픔이나 힘겨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허무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별이란 나의 노력 따위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중대한 질병에 걸리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다가 문득 죽음의 실체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허무감과 덧없음이겠지요.


그렇다면 허무감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질병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질병을 치료하고자 괘락에 탐닉하거나 신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적인 질병이라면 나는 인간적인 방식으로도 해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의 내 상태를 진지하게 사유함으로 말이죠. 니체는 말했지요.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를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이런 목적의식 덕분인지, 나는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빠져들었습니다. 저자의 필력 덕분도 있겠지만 저자가 처한 상황에 공감했던 탓이 클 것입니다. 그는 최근 2~3년 사이에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함을 체험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고, 그가 살고 있는 나라 일본에서 대지진을 목격한 게지요. 그가 책의 독자를 향해 말합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며 고민하는 사람들, 비참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을 안은 채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죽은 아들과 내가 합작한 기도의 말이다."


그는 첫째 장에서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높이'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행복방정식 대신 새로운 방정식을 제안합니다. 안이하고 피상적인 낙관론 대신에 인생의 고해를 정직하게 다루는 비관론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만큼이나 불행과 동행할 줄 아는 지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터라 저자의 문제제기에 공감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와 같은 행복론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게된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고뇌나 수고에 눈을 돌리고 그 의미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비로소 새로운 형태의 행복이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저자는 현대인들이 고독한 원인을 한시라도 자기를 잊는 일이 없는 비대해진 자의식에서 찾고(2장), 우리의 다섯 가지 고민거리(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에 대해 설명합니다(3장). 자기찾기 열풍이 어떻게 우리를 억압하는지에 대한 설명(5장)도 인상적입니다. 


"진짜를 찾아라! 라는 구호 같은 담론이 항간에 흘러넘치고 있는데, 지금의 제가 진짜가 아니라면 여기 있는 저는 가짜인 걸까요. 어떤 사람일까요. 투명인간일까요. '진짜가 되어라'는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진짜가 되고 싶다'라고 필사적이 되는 데에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제가 인상적이라고 한 것은 자기계발 담론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이미 <긍정의 배신>, <자기계발의 덫>과 같은 사회과학을 기반한 저자들이 자기계발 담론을 비판한 적이 있으니까요. 강상중 교수의 신선함은 '자기 찾기의 역사'를 나름의 혜안으로 풀어내었다는 점입니다.  


6장의 제목은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입니다.  저자의 생각은 '그렇다'입니다. 그의 조심그런 전망이 반가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거듭나기'의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성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이 떠오릅니다. 방황과 혼돈을 견뎌내야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장은 혼란을 앞세우고 오는 걸까요? 아무튼 저자는 '거듭나기'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저는 3월 11일의 경험을 어떻게든 '거듭나기'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이고 좌절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철저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는 일조차 없이 그저 '실패를 망각하는' 방법만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부모님과의 사별, 뜻밖의 군입대 등의 마음병을 앓으면서 조금씩 성장한 듯 합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지금 저도 저자처럼 또 아픈 기대를 하게 됩니다. 사별의 슬픔과 허망감을 어떻게든 '거듭나기'의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책의 7장~9장은 제목은 이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갈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인생이 던진 물음에 답한다. 운명은 받아들이고 인위는 극복하자, 고통을 제대로 끌어안아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등의 지혜들을 설명한 장입니다. 


저자는 책을 출간하고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이한 낙관론은 범죄다. 미래는 밝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나는 그의 정직한 비관론에서 얼마간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책을 덮고서 얻은 유익은 또 있습니다. 거듭나기를 향한 비전, 성장하기 위해 아픔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약간의 의지가 생겼습니다. 독서를 통해 받은 위로와 의지가 쌓여가면 아픔을 겪기 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테지요. 


아! 한 가지 더.  책을 읽고서 인간의 필멸성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생의 의미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살아야 하는 이유와 생의 의미를 고민해 보려고요. 나도 머리를 달고 다니니까요. 


저자 강상중 교수는 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정교수입니다. 그는 2013년 봄, 일본 교수 사회에서 최고 명예로 꼽히는 도쿄대를 떠나 세이가쿠인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도쿄대 정교수 퇴직이 2~3년 남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년 퇴임 뒤 옮기면 갈 곳이 없어서 가는 꼴이 돼 세이가쿠인대학에 실례가 됩니다. 폐품처리가 아니라 재생을 위해 옮기는 거지요."


그는 거듭나기에 성공한 것일까요? 그의 거듭나기가 완료형인지 진행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끌어안으며 고민했을 거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순 셋 그의 인생은 어디로 행진할까요? 얼마나 더 성장할까요? 궁금해집니다. 그의 삶이. 그리고 나의 인생도.


- 고통을 포옹하며,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