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훌쩍 한국여행

제주 패키지관광을 다녀오다

카잔 2013. 8. 2. 17:56

 

새섬과 제주도를 잇는 '새연교'

 

1.

8월 초의 제주는 덥고 습했다. 가이드는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의 엄청난 폭우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제주엔 몇 개월째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라고 했다. 가뭄과 폭우를 만난 제주와 서울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벗어나 살 수는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태양이 내리쬐면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한다. 기후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되지만, 자기 인생을 피할 수 있는 여행은 없다. 외면이나 도피를 목적으로 여행을 떠날 순 있겠지만, 새로운 곳에서도 머지않아 이전에 머물던 곳에서의 인생과 비슷한 삶을 만들 것이다.

 

자기 인생에서 벌어진 중요한 일이라도 다른 사람에겐 중요치 않다. 자신에게 짜증이 나는 일도 타인에겐 성가신 일이 아니다. (맑은 날을 살아가는 제주도민이 서울의 비를 성가시게 생각할 확률은 낮다.) 며칠 전, 3기 와우팀원에게 메일을 쓰다가 세 번이나 인터넷 익스플로러 창이 갑자기 닫혔다. 세 번째로 쓰는 메일이지만, 궁시렁대는 말을 담지는 않았다. 

 

"아! 벌써 세 번째야. 인터넷에 자꾸 오류가 나서 메일을 날려 버렸지 뭐니. 조금 전에는 술술 적었는데 썼던 말을 다 복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라는 식의 말은 쓰지 않았고, 앞선 메일에 비해 빈약하게 작성하지도 않았다. 나는 마치 처음 쓰듯이 정성으로 메일을 썼고, 비슷한 수준의 충실함으로 내용을 채워 메일을 보냈다. 이것은 일상의 승리였다.

 

서해안해양도립공원 중 하나인 '문섬'

 

2.

오랜만의 패키지 여행이었다. 1박 2일 동안 세 번이나 쇼핑센터에 들러야 했고, 4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고, 자유 시간이라고는 첫째날 일정이 끝난 뒤의 약 한 시간 정도가 전부였다. 예상했던 일이니 스트레스를 받거나 아쉽진 않았지만, 패키지 여행의 단점은 분명히 느끼긴 했다. 소중한 시간을 지역 특산물 구매에 할애해야 한다는 것, 불필요한 구매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자유과 여유가 없다는 것(이건 치명적이다) 등.

 

패키지 여행의 장점은 뭘까? 저렴한 비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생각은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 원리(?)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진한 착각이다. (순진의 일부는 생각없음이리라.) 여러 일손으로 패키지 여행이 굴러간다. 항상 가이드가 동행하고 기사가 운전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행사 직원들이 지원한다. 사람이 움직이는 곳에는 돈이 투입된다. 투입 경로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제주여행의 경우, 투입 경로는 이렇다. 눈에 보이는 가이드팁. 이것은 크지 않은 금액이다. 쇼핑센터에서 구입하는 물건도, 여행지에서 추가되는 옵션 관광도 가이드에게 마진이 떨어진다. 제주 패키지 여행에 성산 일출봉, 함덕 해수욕장, 정방 폭포, 천지연 등의 자연을 관람하는 일정보다 포니밸리(18,000원), 매직아일랜드쇼(18,000원), 유람선(17,500원) 등의 비용이 큰 옵션 관광이 붙는 까닭이다. 마진이 큰 쪽으로 동선을 짤 수 밖에 없다.

 

여행사의 표리부동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이번 가이드는 쇼핑센터에서 물건을 구매하면 자신에게 얼마가 돌아오는지 말해 주었다. 솔직하고 시원했다.) 패키지 여행이 저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조금 흥분했나 보다. 내 지인 중에는 패키지 여행이 싸다고 노래를 부르는 분이 계신다. 그는 친구들과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는데, 1인당 일백에서 수백 만원어치 쇼핑을 해 오셨다. 난 꽤나 속상했었다.

 

패키지 여행의 장점은 없다, 고 말하면 이번에는 내가 생각없는 발언을 한 것이리라. 장점, 물론 있다. 세 가지만 꼽아 보련다. 최고의 장점은 접근의 용이성이다. 여행의 노하우가 없거나, 낯선 곳이 두렵거나, 언어가 안 된다며 걱정하는 분들이 쉽게 여행의 경험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패키지 상품은 능동적인 여행이 아니라 수동적인 관광이라는 점에서 아쉽긴 하나, 접근의 용이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분명 중요한 포인트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이 두번째 장점이다. 함께 다니다 보면 친한 사람이 생겨 여행이 즐거워진다. 평생 우정이나 연인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추억도 형님 한 분을 만난 것이다. 세번째 장점은 편리함이다. 티켓을 구매하려고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어디를 둘러보아야 할지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된다 - 이런 편리함이 '살아있는' 체험을 '수동적인' 관광으로 전락시키는 면도 있긴 하지만.

 

에코랜드의 풍경

 

3.

나는 여행을 쉽게 떠나는 편이다. 나름의 여행 노하우와 가고 싶은 여행지를 가슴 속에 품고 있다. 여행을 용이하게 만든다는 패키지 상품이 내겐 매력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까닭은, 여행가이드를 통해 '와우그랜드투어'의 가이드 역할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고 말하고 싶지만 이것은 2차 목적이다. 실제로는 홈쇼핑에서 저렴한 패키지 상품이라고 '착각'하여 구입했다. (모양 빠지는 진술이나, 사실이다.)

 

가이드로부터 배우고 싶다는 의도도 사실이어서, 나는 작고 씩씩한 가이드의 달변을 들으며 배울 만한 것들을 메모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 : 최대한 솔직해야 한다, 패키지 상품의 한계를 미리 말해두어 단체여행의 불평사항에 대해 선을 긋는 것도 필요하다, 여행을 방해하는 태도, 말, 분위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대한 조언을 하면 효과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행 동선과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박학할수록 좋다 등.

 

4.

6~7년 전, 친구와 단둘이 제주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횟집에는 광어, 우럭 등의 가격이 표시되어 있었고 다금바리에는 '싯가'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돈 많이 벌어 언젠가 다금바리 먹으러 오자는 류의 말을 주고 받았다. 허나 2013년 제주 여행을 왔더니,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요즘에는 다금바리와 오분자기가 거의 잡히지 않는단다. (돈을 많이 벌어 다금바리를 먹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아쉽거나 안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가이드가 추천한 제주 별미는 말고기였다. 최근 수년 사이에 말고기가 뜨고 있다는 전언이다. 첫째날 여행을 마치고 흙돼지 삼겹살을 먹으려던 계획을 바꾸어 말고기를 먹었다. 말고기를 먹은 것은 생애 처음인 것 같다. 사시미, 육회, 스테이크, 구이, 찜, 샤브샤브에 이르는 총 6가지 방법으로 조리된 말고기를 먹었다. 낯선 맛이니 별미였다. 소고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말고기 자체가 새로워서 신선했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둘째날 일정에 승마체험이 있었다. 혹자가 말했다. "어제 말고기를 먹고서 오늘 말을 타려니 미안하네요. 마음이 좀 그래요." 나는 동물을 학대하는 일에는 아연실색하나, 동물을 먹는 것에 지나친 연민을 느끼는 것은 감상주의라 생각하는 편이다. 사자가 노루를 잡아먹듯, 사람이 동물을 먹는 것은 생태계의 일부라 여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다르긴 했다. 어제 먹었던 고기를 이튿날 타야 하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경우는 없었다. 생각해 보라. 어제 치킨을 먹었는데, 이튿날 닭을 탔던 경험이 있는가? 돼지고기를 먹고서 돼지를 타는 경우도 없다. 쇠고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어제 말고기를 먹고서 이튿날 말을 탔다. 내가 동물을 먹고서 미안함을 느낄 줄은 몰랐다. 아니다, 이건 고마움인가. 말아! 고맙다. 아니 미안하다. 나, 감상주의에 빠졌나보다. 말은 말총에서부터 뼈의 골수가지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나는 격하게 동의했다.  

 

에코랜드

 

5.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관광지는 에코랜드와 서귀포해상도립공원이었다. 에코랜드는 아르헨티나를 경유하여 이과수 폭포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물 위로 세워진 나무다리를 건너는 느낌이 비슷했다. (아르헨티나는 강이고, 에코랜드는 인공호수다.) 에코랜드의 풍광은 아름다웠고,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재미도 컸다. 역마다 테마공원이 펼쳐져 있으니 하루를 보내기에 맞춤했다. 좋은 곳을 고작 한 시간 남짓 둘러본다는 것, 패키지 관광의 아쉬움이다.

 

정방폭포, 문섬, 범섬, 섶섬, 새연교 등이 있는 서귀포해양도립공원은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았다. 패키지 여행 특유의 수동성 때문에 유람의 즐거움이 상쇄되긴 했을 테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섬을 둘러보는 맛이 좋았다. 바다에서 본 외돌개와 주상절리, 그리고 정방폭포가 가장 나은 풍광이었다. '도립'공원, 이름을 참 잘 지었다. 확실히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나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함에는 미치지 못했으니까.

 

머물고 있는 곳을 더 멋진 곳과 비교하며 평가했던 것은 아니다. 평가는 몰입과 음미를 방해한다. 평가란, 거리두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험하는 순간에 내가 선택하는 것은 평가가 아니라, 몰입과 음미다. 날씨가 더웠지만 새섬 산책을 즐겼고, 간간히 부는 바닷바람을 음미했다. '에이, 거기가 더 낫네' 하는 류의 말은 듣는 이에게도 김빠지는 소리다. 이번 패키지관광을 잘 즐겼던 이유는 자유 여행과 전혀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주시 '서한두기'에 바라본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