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조르바 원고쓰기의 어려움

카잔 2013. 11. 19. 13:05

 

지난 주에 이어 벌써 2주째다. 화요일은 <책을 이야기하는 남자> 조르바 원고를 보내는 날이고, 오늘이 화요일이다. 지난 주엔 세 시간 넘게 책을 고르다가 결국 포기했다. 제작자에게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냈고, 이튿날 오전에야 원고를 보냈다. 마감일을 넘겼다.

 

이번 주에도 흘러가는 양상이 비슷하다. 오전에 세 시간 가까이 보냈지만, 아직 원고로 쓸 책을 고르지 못했다. 이크. 이거 큰일인데...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조바심까지 더해졌다. 조바심은 일을 완성하기보다는 그르치기에 좋은 징조다.

 

원고 마감일을 넘길 때마다 자책감이 든다. 프로답지 못하는 생각들이 얼마간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마감일을 철저히 지켜내는 작가들도 많다. (그렇지 않은 작가들이 더 많기를 바란다.) 나는 그렇지 못한 작가다. 마감일을 철저히 지키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나는 왜 마감일을 지키지 못할까?

 

우선 얼마나 자주 펑크를 내는지부터 살펴야겠지. 열에 세 번 정도는 마감일을 넘기는 게 아닐까 싶다. 열번 중 한두 번일 거란 생각도 들지만(조르바 원고도 지난 주 이전까지는 꼬박꼬박 냈다), 유리하게만 기억하는 인간 본성을 감안하면 세 번 정도는 될 게다.

 

나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마감일을 지키고 싶다. 기준이 너무 높으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될 확률도 높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이상주의자다. 직업에서만큼은 높은 잣대로 나를 제련하고 싶다. 그런 잣대를 능히 통과할 만큼 나를 컨트롤하고 싶기도 하고.

 

이런 이상적 잣대를 글쓰기에 갖다 댈 마음은 없다. 글의 '품질'을 지나치게 따지고 싶진 않다는 말이다. 그렇잖아도 퇴고까지 해낸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지 않고 있는 나다. 이유는 하나! 아직 부족한 원고라 손을 더 봐야 한다는 것. 이러는 내가 나도 때론 괴롭다.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품질'이 아닌 '마감준수'다. 이것은 품질의 문제, 다시 말해 잣대가 높아 지적 생산물을 어딘가에 내놓지 못하는 문제도 얼마간은 해결해 줄 것이다. 마감일을 준수하는 것은 단지 괴팍한 기질 문제만이 아니다. 작가로서의 핵심 과업이다.

 

나는 게으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거의 매일 글을 쓰고, 글쓰기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한다.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칭한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서로 다른 풍경이었다.『인간실격』의 저자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나태에 관해서만큼은 나는 진짜다. 설마하니 그렇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한심하다. 이것이 나의 최대 결함이다. 분명 부끄러운 결점이다."

 

그는 과연 나태의 대가다웠다. 가시를 발라야 하는 생선은 귀찮다는 이유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날씨가 더워도 귀찮다는 이유로 부채질도 하지 않는단다. 불쑥 맹렬하게 일어났다고 쓰더니 독자더러 놀라지 말란다. 글을 쓰기 위함이 아니라, 뒷간에 가는 거란다.

 

세상 사람들을 게으름과 근면함이란 두 부류로 나뉜다면, 나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조르바 원고를 쓰지 못한 원인도 일주일 동안 책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고 너무 많이 읽어서이다. 읽은 것들 중에 조르바 원고에 다룰 만한 책이 없을 뿐.

 

아! 원인을 알겠다. 사실 알고 있던 원인이었다. 성실하지만 목표를 향하지 못한 산만한 책읽기가 하나의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까다로운 선정 기준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나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너무 근면해서, 정확하게는 그 근면함이 내가 얻고자 하는 성과를 향하지 않아서 원고를 쓰지 못하고 있다. 원고를 쓰기에 적합한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어왔던 것.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책들을. 

 

강성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헤르더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이재현 『모바일 문화를 읽는 인문사회과학의 고전적 개념들』

제럴대 앨런 코헨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이런 책들은 애초부터 조르바 원고와는 별개로 읽는 책들이다. 물론 조르바 원고를 위한 책들도 읽는다. 지난 2주 동안 읽었던 책들은 이렇다.

 

김영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다자이 오사무 『나의 소소한 일상』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버트런트 러셀 『인기없는 에세이』

 

읽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조르바 원고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김영하의 소설은 내가 꼽은 최고의 김영하 장편이지만(아직 『빛의 제국』과『아랑은 왜』는 못 읽었다.), 그래서 다룰 만한 가치가 넘치는 책이지만, 내가 김영하를 충분히 모른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지금까지 다뤘던 원고의 저자들을 잘 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김영하는 좀 더 '알고서' 쓰고 싶은 작가다. 이런 식으로 작가든, 책이든 좀 더 알고 나서 쓰기 위해 보류된 책들이 많다.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마케팅 천재가 된 맥스』, 『본성과 양육』, 『한국대표시집 50권』 등은 훌륭했지만, 아직 내가 부족하단 생각에 쓰지 못했다.  

 

『이게 다예요』는 기대만큼 영감과 감동을 받지 못해서 탈락, 『인기없는 에세이』는 매우 재밌지만 너무 적게 읽어서 보류, 『나의 소소한 일상』은 다자이 오사무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된 반가운 책이지만, 아직 숙성이 덜 되어 보류. 

 

보류와 탈락의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최근 읽은 『언어의 천재들』은 내가 좀 더 실험해 본 후에 써야겠다고 해서 보류,  지승호 인터뷰집을 조금 읽었지만 2002년도에 출간된 책이라 시의성이 지나가서 독자 대상의 폭이 너무 좁다는 이유로 탈락.

 

칩 히스 댄 히스의 『스틱』은 책의 메시지대로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져 독자들에게 스티커처럼 달라붙은 메시지의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간다. 막다른 즈음엔 '데드라인'이란 괴물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서 있다. 영어지만, 이름 참 잘 지었다. Dead Line, 죽는 선이라고? 어원을 찾으려다가 관뒀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누가 나를 본다면, 이 글을 쓸 시간에 원고를 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 글을 쓰지 않았더라도 나는 원고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비관적으로 나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조르바 원고 90편을 쓰며 발견한 어떠한 패턴이 있어 한 말이다. 

 

2주 연속으로, 합쳐서 6시간 이상을 책을 고르느라 시간을 보낸 것이 나는 아쉽다. 그 귀결로 이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오후를 맞이하는 마음이 씁쓸할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며 원고를 시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나를 위무한 것이다.  

 

(한 두 마디만 더. 나는 모든 시간을 생산적, 실용적으로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은 없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있음'에 대해 들었고, 보았고, 체험했다. 다만 내 직업에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예술가이고 싶다. 기간에 대해 누군가와 약속을 했다면 그것도 지켜가면서.

 

약속을 못 지켰다면 반성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반성의 결과로 나의 노력들이 성과를 향하여 한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는지를 물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노력들을 어느 정도는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과할 일은 사과하고, 잘라야 할 것은 잘라내고, 더해야 할 노력은 더해가며 나는 프로 작가로 성장하고 싶다.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균형을 황금 비율로 맞추어 살고 싶다. 이를 위해 지금의 내가 노력해야 할 일은 성과 중심의 작업에 치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