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폼페이>를 통해 얻은 생각들

카잔 2014. 3. 26. 22:17

고대 로마의 지방도시, 폼페이의 연안

 

<폼페이>는 역사를 복원한 영화다. 무엇을 복원했는가? 그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간 화석은 사실인가? 나는 영화가 ‘역사’가 아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영화 <폼페이>를 두고 왜 역사와 다르냐고 따지진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역사를 다룬 이 영화가 지니는 가치와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1.

<폼페이>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당시 로마의 배경을 살펴보자. 영화가 다룬 시간적 배경은 로마 제국의 시대다. 정확하게는 서기 79년인데, 이때는 어떠한 시대였나? 전후의 역사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Before>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로마는 510년에 공화정을 거쳐 기원전 27년에 제정 시대를 열었다. (제정은 황제가 광대한 영토의 제국을 다스리는 정치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로마가 초강대국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가장 유명한 로마 황제 중 한 명인 ‘네로’는 제국의 5대 황제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서기 54년에서 68년까지였다.

 

<After>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로마 제국의 황금기는 5명의 유능한 황제가 재위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세습이 아닌 원로원의 의원 중에서 탁월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했던 시절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네르바(재위 96∼98),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 이들을 '로마 5현제'라 부른다. 전체 재위 기간은 96년~180년이다.

 

폼페이의 원형 경기장

 

요컨대 서기 79년은 로마 제국이 정점을 향해 점점 발전해가던 시절이었다. 제국의 중심지로마는 타락한 면도 있지만, 그런 타락에도 멸망하지 않을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폼페이'는 나폴리의 남쪽 연안에 위치한 상업이 발달한 지방 도시였다. 멀리 베수비오산이 내다보이고 아름다운 바다를 접한 폼페이에 대해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 모리노 다쿠미 『고대유적』中

 

 

2.

79년 8월 24일 정오,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엄청난 재해는 당시 폼페이 인구의 10%에 달하는 2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재난의 참상이 전해진 것은 당시 나폴리에 머물던 정치가 플리니우스가 역사가인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 담겼던 덕분이다.

 

폼페이는 천 오백년이 지나 우연히 발굴되었다. 운하를 건설하다 고대 도시의 건물이 발견된 것이다. 몽테뉴가 죽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의 일이다. 초창기의 폼페이 발굴 작업은 마구잡이로 진행됐다. 보물을 노린 도굴 자들이 땅을 무작위로 파헤쳤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발굴이 진행된 것은 3세기가 지나서였다.

 

19세기 중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의 지휘하에 조직적 발굴이 진행됐다. 발굴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주세페가 풀지 못한 의문이 있었다. 고대 도시에 살았을 사람들의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지층에 수없이 뚫린 두더지 구멍과 같은 빈 틈의 용도였다. 주세페의 창의적 노력으로 빈틈에 관한 의문은 풀렸고 폼페이 시민들의 존재도 밝혀졌다.

 

주세페는 구멍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구멍에 석고를 부었다. 석고가 굳으면 구멍의 모양이 드러날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발굴단 앞에 드러난 석고 캐스트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죽어갔던 순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석고 캐스트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뒤덮은 화산재는 오랜 세월 동안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부패하여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 석고 캐스트가 인간 화석의 정체였다.

 

석고 캐스트는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했다. 몸을 뒤틀며 죽은 개,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땅바닥에 배를 대고 죽어간 산모 모양의 캐스트는 이천년 전의 참상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연인이 서로 부둥켜안은 모습의 석고 캐스트도 있었다.

 

영화에선 이 모습대로 화석이 됐지만, 실제는 쓰러진 채로 서로에게 팔을 뻗은 모습임.

 

3.

영화 <폼페이>의 마지막에 장면을 장식한 서로 부둥켜안은 인간 화석, 아니 석고 캐스트는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로는 스탠딩 캐스트가 아니라, 쓰러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석고 캐스트만으로는 그 연인들의 신분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했던 젊은이인지, 서로를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상상의 영역이다.

 

상상은 역사의 임무가 아니다. 이때 예술이 필요하다. <폼페이>는 부둥켜안은 석고 캐스트에서 출발한 영화다. 팩트에서 시작하여 상상력의 도움으로 완성된 스토리다. 영화 속의 남자는 노예였고, 여자는 영주의 딸이었다. 이것은 상상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이다. 허구적인 스토리지만, 개연성을 갖게 된 것은 영화의 배경과 주요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도시'는 역사적 사실, '전설이 된 사랑'은 예술적 상상.

 

예술의 본질은 표현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무슨 내용인가’보다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예술의 본질을 더욱 잘 보여준다. 소설이든, 영화든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상상의 근원은 다양하다. 역사적 사실일 때도 있고, 멋진 아이디어일 때도 있다. 때로는 하나의 작은 정보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훌륭한 작가는 신문의 짧은 단신으로도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신문을 매우 주의 깊게 읽었다. 그는 단신조차도 건너뛰지 않았다. 그의 상상력과 공상 덕분에 단신들을 하나의 온전한 비극적 또는 희극적 소설이 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전하는 것, 이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영화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멸망한 폼페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스토리로 재창조한 예술의 산물이다. 내용을 알고 싶다면, 영화관이 아닌 역사책을 살펴야 할 것이다. 예술을 접했으니, 관객은 “역사랑 왜 다른가?”가 아니라 “영화가 전하려는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이 잘 표현되었나?”라고 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말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내가 더욱 사랑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우정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어떻게 우정이라는 가치를 키울 수 있는가? 나는 자유롭게 사는가? 좀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영화 <폼페이>라는 스토리의 소재가 사랑, 우정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이기 때문이다.

 

화산으로 불바다가 된 도시 폼페이

 

4.

영화 <폼페이>로 예술의 본질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 제국에 관심이 있다면, 공부의 길잡이를 만나게 된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 공부에 중요한 도시다. “폼페이는 로마 제국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놀라운 창입니다. 많은 문헌과 고고학적 유산을 통해서도 로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지만, 폼페이는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도시 생활의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앤드류 W. 하드릴 교수의 말이다.

 

화산재가 뒤덮은 폼페이 붕괴의 방식 때문에, 당시의 도로와 건물 형태가 그대로 남게 되어 지금도 폼페이에 가면 잘 구획된 도시의 주거지와 도로를 볼 수 있다. 마차 바퀴가 지나간 자국까지 선명할 정도로 말이다. <폼페이>를 소재로 한 예술이 인간 삶에 필요한 가치(사랑, 우정, 자유)를 생각하게 한다면, 이를 소재로 한 역사는 고대 로마 연구의 보고인 것이다. 나는 고대 로마에 관심이 많다. 영화 <폼페이>를 재밌게 볼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마일로(오른쪽)과 앗티쿠스(왼쪽)

 

5.

영화 <폼페이>는 내게 무엇이었나? 남녀 주인공인 ‘마일로’와 ‘카시아’와의 사랑보다는, 마일로와 우정을 나눈 흑인 노예 ‘앗티쿠스’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앗티쿠스의 검투사 정신을 잃지 않은 점,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정을 존중하는 모습, 해일에 휩쓸리기 직전에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외친 삶의 마지막 모습 등이 감동을 주었다.

 

고대 로마인들이 노예를 학대하는 모습이나 검투를 시키는 장면을 두고, 그들을 잔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도덕관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잔인한 건 맞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절에 태어났으면 잔인하다고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보다 수백년 후의 사람들은 21세기의 사람들이 복싱이나 K-1과 같은 격투기를 즐긴 것을 두고 우리를 야만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야만적이라 보는 미래인들과 로마인을 잔인하다고 말하는 현대인들은 모두 틀렸다. 도덕적 평가는 당대의 문화를 잣대로 이뤄져야 한다.

 

주인공 카시아와 그녀의 흑인 노예

 

여주인공보다 그녀의 흑인 노예가 더욱 예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영화로의 몰입이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 감각이 작동할 때마다(‘노예가 더 예쁜데?’) 영화가 말하고 있는 스토리를 인식하는 것이다(‘마일로의 사랑은 카시아야’).

 

영화가 끝나고 인간 화석의 존재가 실재했음을 알고 난 후, 나는 그 커플의 마지막 데이트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했다. ‘싸우진 않았을까, 즐거운 날이었은까?’ 자신들의 슬픈 운명을 전혀 모른 채로 보냈을 79년 8월 24일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헛헛해진다. 서울 주변에 화산은 없지만, 삶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다음의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주의를 기울여 현재를 살자!’

 

폼페이의 연인, 실제 석고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