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아산병원 주요 면회일지

카잔 2014. 7. 6. 06:58


6월 9일(월)

 

비보(悲報)는 불청객처럼 찾아든다. 석촌호수 어느 카페에서 와우팀원과의 미팅 중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 아내였다.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단다. 길어야 두 달! 그녀가 흐느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앞에서 친구와 함께 보냈던 25년의 주요 장면들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주변을 밝히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나만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세상엔, 할 말을 잃은 한 남자만이 존재하는 듯 했다.

 

병원에 갔다. 친구 아내는 의사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그녀는 <NO CPR>이라고 쓰인 간호 차트도 보았단다. CPR은 심폐소생술을 뜻한다. 이젠 위급해도 심폐소생술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좀 더 연장하는 것이 환자의 고통을 더할 뿐 더 이상 의미가 없단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이 사실을 어떻게 친구에게 알릴 것인지를 두고, 친구 아내와 고민했다. 내일은 형님이 올라오시기로 했다. 나도 그에 맞춰 오기로 하고서 병원을 나섰다.

 

6월 17일 (화)

 

친구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번 주에 접어들면서, 하루 중 잠들어 있는 시각이 굉장히 많아졌다. 면회를 가서는 친구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힘겨워하는 그녀의 이야기, 친구의 남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 그녀는 지쳐 있었다. 8개월 동안 내내 병간호를 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면회를 갈 때마다 친구와 나눌 이야기를 정해 두고서 기회 될 때마다 말을 걸었다.

 

“친구야, 하고 싶은 일은 없냐?”

“애들 한 번 보자.”

“누구 애들?”

“인스펙션...”

(*인스펙션 : 학창 시절 6명 친구들의 모임 이름.)

 

면회를 마치고 병실을 나서려는데 친구가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석아, 내 하나 물어보자.”

“작년에 구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너 알잖아.”

“응, 돌아가시기 6일 전에 뵈었지.”

“그때 선생님이랑, 지금의 나랑 비슷하나?”

 

나는 흠칫 놀랐다. 당시 선생님 모습이랑 많이 비슷하여 절망스러워하던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른 대답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지금 니가 훨씬 더 좋아. 아직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눈물을 삼키며 푸석해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속으로 빌듯이 말했다. ‘친구야! 힘 내라.’ 이 말이 그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6월 18일 (수)

 

친구 곁에 있다가 컨디션이 올라오면 깨워서 말을 주고받는 식의 면회가 이어졌다. 녀석이 대답하기는 힘들고, 고개 끄덕임으로 대신한다.

 

"친구야, 꼭 일어나야 한다. 이제 네 목숨 하늘에 달린 게 아니겠냐, 너도 알지? (끄덕) 하늘에 달린 것이니 니가 먼저 포기하면 안 된다. 진인사 대천명, 나 요즘 이 말 붙잡고 병원에 온다. 하늘의 뜻을 기다리되, 그 전에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본다는 이 말이 좋더라고. 그러니 니가 할 일은 아무리 아파도 희망을 갖고 힘을 내는 거다. (눈물 흘리며 끄덕)

 

이렇게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도 알지? (끄덕) 이런 말 하는 나를 용서해라.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끄덕) 그래, 난 니가 일어나서 몇 달 아니 몇 주 만이라도 거동하면서 네 마지막 하고 싶을 일들을 하는 거다. 그러니 힘을 내서 내가 지금 말하는 걸 잘 생각해야 한다. 계속 얘기할까? (끄덕)

 

네가 컨디션이 좀 좋아질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게 있다. (적어온 종이를 보며) 니가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남기고 싶은 것 이렇게 다섯 가지다. 기억하겠나? 니 영어 좋아하니까 영어로 정리하면, meeting, doing, going, eating 그리고 legacy 다. 친구야, 이렇게 앓고만 있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훌쩍 가 버리면 정말로 안 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끄덕) 욱아, 고맙다. 나는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의식을 차리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절박했던 날들이었다.

 

내가 어렵게 생각한 게 있는데, 얘기를 더 해도 되나? (끄덕) 이건 제수씨가 원하는 건데, 수영이 미은이에게(가명) 나중에 보여줄 동영상 하나 찍었으면 하더라. (녀석이 울음을 터트리고, 나도 울먹였다.) 욱아, 네가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녀석들 크는 거 보면 제일 좋은데, 만에 하나라도 안 될 가능성을 위해 동영상 하나 찍자. 미은이가 나중에 아버지 모습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나. (끄덕) 나도 엄마 영상이나 목소리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거든. 내 마음 알지? (끄덕)”

 

6월 19일 (목)

 

오전 9시에 목사인 친구랑 함께 병원에 갔다. 서로는 나를 통해 아는 사이, 목사 친구는 아픈 친구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기도가 끝나고 나도 기도했다. 하지만 욱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기도를 들을 뿐, 일어나지도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사실 제대로 듣기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목사는 가고, 친구는 잠을 잤다. 친구 아내가 점심 식사를 위한 먹거리를 사러 간 사이 나는 친구랑 30분 동안이나 대화를 했다. (13:25분부터 14시까지.) 대화 몇 대목을 옮겨 둔다.

 

#. “석아, 길면 6개월이나 1~2년은 살 줄 알았는데, 어젯밤에는 이제 며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아픈 게 좀 달라졌다. 자꾸 숨이 가빠지며 아프다.”

“제수씨에게도 이 말을 했나?”

“아니 오늘 아침에 든 생각이다.” (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상욱아, 내일이라도 수영이 미은이에게 보낼 영상을 찍자.”

 

#. “욱아, 뭐가 제일 걱정이냐?”

“내가 죽고 난 후의 가족들 삶이지.”

 

병원을 나서며 인스펙션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상욱이가 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욱이가 정신이 없어서 헛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들을 말을 문자로 옮기는 일이 무척 겁나기도 했다. 어쨌든 일요일 저녁에 모두 면회를 하러 가기로 시간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