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근로는 미덕이 아니다?!

카잔 2014. 7. 26. 09:09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이다. (p.18)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p.21)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고, 축구 시합을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들이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p.30)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p.33)

 

-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중에서

 

 

러셀의 주장은 간단하다. 두 가지다. 1) 근로는 미덕이 아니다. 2) 여가를 늘려 제대로 누려라. 1번에 대해서는 타당한 주장인지부터 헷갈릴 것이다. 근로 없이는 생계를 어찌 해결한단 말인가. 이 글에서 러셀은 '개인의 밥벌이 수단'으로의 근로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통치 수단'으로의 근로의 미덕을 물었다. 그러니 일을 통한 경력 개발과 생계 해결이라는 문제는 잠시 접어 두자.

 

현대인들에게 근로는 당연한 의무다. 러셀은 이 대목도 비판한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p.20) 그런 까닭에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p.19)

 

왜 우리의 연봉은 몇몇 직종을 제외하고 비슷하게 형성된 걸까? 업종마다 하는 일이 그렇게 다른데도 말이다. 하나의 대답은 월급이 '무슨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일했는가'라는 시간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러설이나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이었다. '노동의 소외'가 일어난 것이다. (러셀은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두어 번 그가 떠올랐다.)

 

러셀의 주장이나 예측이 현재에 모두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일례로, 현대 기술이 우리에게 여가를 가져다 주었다는 말은 발표된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기술은 분명 많은 일손을 덜어주었지만 우리의 근로 시간은 여전하다. 러셀이 그토록 강조한 여가 시간을 늘려 갖기가 만만찮다. 누군가는 방해하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가 필요한 까닭은 두 가지다. 여가를 방해하는 정체를 파악하는 일에도 선생이 필요하고, 주어진 여가를 현명하게 활용하는 법을 익히는 데에도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 5일 근무체제가 일상화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여가의 질이 낮다. 과학은, 집에서 TV를 안고 살거나 주말에 잠을 몰아 자는 것은 좋은 휴식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여가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러셀도 지적했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것들을로부터 차단된다." (p.24) 이제 우리도 문제의식을 갖자.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여가가 필요한가?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비롯한 열 다섯 편의 에세이를 담았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같은 사회적 이슈가 대다수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다소 유토피아적 발상이라고 비판 받았지만, 근로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삶은 행복과 멀어진다는 정도로 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러니 러셀의 주장에 거부감이 들면, 내게 일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은 무엇일까, 라고 묻자.

 

유토피아적 발상이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다. 하루 4시간 근무라니! 러셀은 80년 후, 『4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예상했을까? 우리는 러셀과 티모시 페리스의 주장대로 살 수 있을까? 

 

 *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역,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 티모시 페리스, 『4시간』, 부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