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친구는 내게 도움 되어야 하나

카잔 2014. 7. 28. 10:44

 우정을 다룬 고대 그리스 로마의 중요한 저작은 세 권이다. 플라톤의 『뤼시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그레일링은 키케로의 저작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해 다른 사상가들의 저술에 기댄 면이 있지만, 우정을 폭넓게 조망한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고전적 논의”라고 평했다.


『우정에 대하여』의 화자는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다. 키케로에게 우정을 가르쳐 준 인물이다. “인생에서 우정을 앗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태양을 앗아가는 꼴 아닌가.” 라일리우스의 말이다. 그는 아타락시아(마음의 평화로 평온한 삶)보다 우정을 우선시했다. 권력, 쾌락, 부와 명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키케로는 충정을 우정의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키케로에 앞서, 플라톤은 우정이 유용성을 토대로 한다고 보았다. “친구는 내게 도움이 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플라톤은 동의했지만, 그의 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이 상호유용성에 기반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그에게는 상응도 우정이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교감하는 상응(相應)!


나는 우정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기 위해 고대를 거쳐 르네상스로 넘어갔다. 지적인 성찰의 보고, 몽테뉴의 『수상록』이 있으니까. 몽테뉴는 훗날 유명해진 에세이 <우정에 대하여>를 썼다. 몽테뉴도 상응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진정한 우정은 필요가 아니라 본능에서, ‘사랑의 감정에 매료된 영혼의 끌림’에서 비롯되는 진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전 작가들의 글은 우정론의 정립을 도와주었다. 그들로부터 배우고 경험에서 깨우친 우정의 조건은 네 가지다. 첫째는 충성스럽고 참된 친분, 충정이다. 어려울 때에도 우정에 변함이 없는가. 충정은 이러한 물음과 연관된다. 우정은 곤경에 처한 친구 곁을 지킨다. 자기 이익에 휘둘리어 떠나는 관계라면 ‘친구’가 아니라 일시적인 ‘동맹’이리라.


둘째는 진솔이다. 꾸밈과 거짓이 없어야 신뢰가 쌓인다. 어떻게 진솔함에 이를까? 진솔하게 대화해야 한다. 속마음과 다른 말로 친구를 대한다면 진솔함이 아니다. 몽테뉴는 우정이란 의사소통으로 가꾸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나는 ‘진솔한’ 의사소통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앞선 충정과 대비하자면, 충정은 행동으로 완성되고 진솔함은 대화로 빚어간다.


셋째는 상응(相應)이다. 서로 응한다는 뜻이다. 서로 잘 알아 굳이 설명하고 해명하지 않아도 통하는가는 상응에 달렸다. 상응하는 친구끼리는 서로 이해하기도 쉽다. 진솔하면서도 잘 통하는 대화라면 어찌 친구가 되지 않을까? 이익이나 필요성이 아니라 진솔과 상응으로 시작되는 관계가 우정일 것이다.


넷째는 배려다. 관심을 갖고 이리저리 마음을 쓰고 염려해 주는 사이가 친구다. 우정의 조건으로 배려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단어는 여럿이다. 나는 존중과 배려를 두고 어느 쪽이 내 생각에 적확한 단어인지 고민했다. 결과는 배려였다. 존중보다 소소하게 일상적인 어감이었기 때문이다. 배려하는 마음의 근본이 ‘존중’이나 ‘친밀함’이겠지만 ‘배려’가 보다 실천으로 이어지기 쉬운 단어라고 여긴 것이다.


네 요소는 필수적이다. 충정만 중요하게 여긴다면, 친구가 아닌 군신에 가까워진다. 배려와 상응 없이 진솔만 남는 관계라면, 법정에서의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 것이다. 상응만으로는 함께 있을 때에만 즐거울 뿐, 서로 떨어져 있거나 힘겨울 때 우정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상응이나 진솔함이 없이 배려만 남는다면 친구가 아니라 허울 좋은 서비스 정신이 되고 만다.


마음이 통하고 진실한 친구에게 배려와 충정을 다하고 싶어진다.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다보면 종종 ‘상응’하는 이를 만날 것이다. 서로 잘 통하니 마음을 주고받으리라. 마음을 나눌수록 더욱 진솔해진다면 우정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신뢰가 깊어지면 평생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싹틀 것이다. 그러한 친구에게 충정을 다하는 관계! 그것이 우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