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책을 이야기하는 졸바

가볍게 만나는 퇴계 선생

카잔 2015. 3. 18. 08:47

퇴계 선생의 시 한 수를 읊어 드립니다. 선생은 1548년 48세 때 충북 단양의 군수로 부임했는데, 백성들을 섬기면서도 자주 시를 지었습니다. 지금의 단양군 장회리 아랫마을에 있는 여울을 바라보며 지은 시랍니다.


<장회여울>

힘을 써야 겨우 조금 앞으로 가고
손 놓으면 대번에 떠내려가지.
자네 만약 뜻이 있거든 잘 봐 두게
여울물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편역자의 해설처럼 “마음을 닦는 데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로 읽히기도 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괴로운 과정도 끝내 이겨내야 한다는 엄중한 조언으로 들리기도 하네요. 저의 해석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겁니다. 제자 이함형에게 보낸 편지에 아래와 같은 글도 있으니까요.


“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했으면서 대번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서 기쁘고 즐거운 맛과 안정된 효과가 있기를 바라고 있더군요. 그리고 공부를 하는 데 공력이 많이 들어가고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괴롭게 여겨, 자신의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다며 그리로 책임을 돌리고 있더군요.” (p.114)


<도산에 사는 즐거움>은 학자요, 교육자요, 시인이었던 퇴계의 다양한 면모를 모두 엿볼 수 있도록 선생의 시와 산문 그리고 편지글을 엮은 책입니다. 시는 ‘자연을 벗 삼아, 매화와 함께 한 나날, 나의 일상 나의 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상을 보니’ 라는 4가지 테마에 따라 엮었더군요.


시인의 마음을 노래한 ‘서정시’가 대부분이고, 철학적 이치를 읊은 ‘철리시’도 더러 있습니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유별납니다. 매화를 읊은 시만 따로 엮어 <매화시첩>을 만들었고, 숨을 거두기 전에는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명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책에는 매화를 노래한 시 8수도 실렸습니다.


산문과 편지글은 ‘참된 나에 이르는 길,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산수 유람의 즐거움’이라는 3가지 테마로 엮었습니다. 퇴계가 남긴 글을 수습해서 간행한 문집에는 편지글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네요. 그래서인지 산문보다는 편지글이 많습니다.

 

퇴계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사상적 진통이 극심했습니다. 성리학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이 첨예했는데, 퇴계가 기대승, 노수신 등의 학자들과 서신으로 벌였던 논쟁은 유명합니다. (기대승이 주고받은 서신은 2003년에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고요.) 성리학은 토론과 논쟁을 거치며 체계화되고 심화되었습니다. 퇴계 선생이 성리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도산을 읽는 즐거움>은 퇴계 선생의 철학적 논변을 담지는 않았습니다. 일전에 <함양과 체찰>이라는 퇴계 입문서로 LG의 계열사에서 독서토론회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론 부분이 어렵다는 반응이었습니다. <함양과 체찰>에서 이론 대목을 걷어낸 셈이니, 성리학 공부가 불필요한 일반인들이 퇴계 선생을 접하기에는 <도산을 읽는 즐거움>이 맞춤하다는 판단입니다. 퇴계를 몰라도 책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으니까요.


요컨대, 책은 학문의 발전을 도운 대학자의 면모보다는 일상을 살아가는 수행자, 독서를 즐기는 학습자, 유람을 즐기는 도량가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서두에 인용한 시와 편지글처럼 마음 수양과 인생살이를 돕는 지혜를 담은 글을 엮었습니다. 몇 구절을 인용하렵니다. 5백여 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도 유용하게 읽히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네요.


“일상적인 가정생활이야말로 학문의 큰 근본을 세워 집중하여 공을 들여야 할 곳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준마가 달리는 것과 같으니, 서른이 되어도 뜻이 확고해지지 않으면 끝이다.”


“대저 그대는 선을 추구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게 문제이며, 학문을 즐기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조급한 게 문제이며, 예를 중시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편향된 게 문제입니다. 그대는 너무 지나치게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을 진정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대는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학문을 즐기기 때문에, 아직 배우지 않은 것도 지레 이미 배운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대는 너무 편향되게 예를 좋아하기 때문에, 기어이 세속을 바로 잡으려 드는 것을 예에 맞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도산에 사는 즐거움>은 돌베개의 ‘우리고전 100선’ 중 여덟 번째 책입니다. 우리고전 100선은 “한국인이 부담감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품격과 아름다움과 깊이를 갖춘 우리 고전”을 선별한 시리즈랍니다. 편역자의 간결한 해설은 시리즈의 품격을 높여 주고, 손에 잡히는 얇은 분량은 독자의 부담감을 덜어주네요.


박희병 선생의 간행사 중 “고전의 현대화는 결국 빼어난 선집을 엮는 일이 관건이자 종착점”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질 좋은 번역 작업까지 더해져야 할 테고요. 정약용 시 선집, 홍대용 선집, 허균 선집, 삼국사기 등이 우리고전 100선의 다른 책들입니다. 일만 원으로 쉽게 풀이한 우리 고전을 손에 쥘 수 있다니!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