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짧은소설 긴여운

또 한 명의 엄마

카잔 2015. 11. 12. 13:58

 

[짧은 소설] J는 퇴근하자마자 서둘렀다. 언니 집에 갈 생각이었다. 왕복 3시간을 달려야하지만, 오늘 가야만 하는 일이 그녀를 움직였다. 회사 문을 나설 즈음 핸드백을 열어 점심시간에 작성한 손 편지를 챙겼는지 확인했다. 이제 자동차를 달릴 일만 남았다. 운전대를 잡고 시내를 빠져나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나 수진이에게 가는 길이야. 일찍 올게.” 어젯밤에 미리 말해 두긴 했지만, 퇴근 후에 세 살, 네 살 아이를 보고 있을 신랑을 생각하면 언니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가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저 안아 주기만 해도 내 마음이 전해질거야.’

 

수진이를 꼭 안아주기, 오직 이것만을 위해 J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분당으로 향했다. 딩동! 언니 집에 도착한 J는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라는 수진의 말에 “이모야” 라고 말했다. “이모, 갑자기 왠일이야?” “너 보려고 왔지.” 수진은 이모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놀랐지만, 이모가 자기 집에 온 이유를 금세 알아챘다. 수진은 고3이었고, 내일은 수학능력시험 응시일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J는 거실에 들어서지도 않고 조카를 꼬옥 끌어안았다. 조카의 등 뒤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수진아, 실수하지 말고 시험 잘 쳐. 마음 편하게 실력발휘 하면 그만이니까 긴장하지 말고.” 수진이도 J도 눈시울이 불거졌다. 포옹을 풀면서 “야, 울자고 이런 건 아닌데... 우리 또 이런다.” 하고 건넨 J의 말에 이모도, 조카도 눈물을 머금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모, 고마워.” “별 말을 다 한다. 이모 또 가 봐야 해. 너무 늦으면 네 이모부 운다. 그리고 이건 이모 가고 읽어봐.” J는 편지를 건네고 발길을 돌렸다. 아직 퇴근 전인 형부와 언니를 보지 못한 것은 예상한 바였다. 몸과 마음의 왕래가 잦은 가족이었으니 두 사람이 서운할 일도 없었다. 수진은 이모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편지를 펼쳤다.

 

<사랑하는 조카에게. 수진아 지금까지 고생했다. 11월이 되니 수시로 네 생각이 나더라. 힘들겠구나, 긴장도 될 테지 등의 생각을 하니 주책없이 찔끔 눈물도 났다. 내일 시험을 잘 치르기를 이모가 기도할게. 그리고 좀 앞서나간 말이긴 하지만, 결과가 어떠하든지, 그 결과를 들고 네 삶으로 뛰어들면 되니까 시험을 치고 나면 당분간 신나게 놀고 편안히 쉬렴. 수진이를 생각하니 이모도 20대를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지네. 네 앞에 펼쳐질 아름다운 시절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내일 시험에서 대박 나면 좋겠다. 부담 없이 실수도 없이 시험 잘 쳐~ 수진아, 사랑해.>

 

J의 자가용은 자동차 전용도로에 올랐다. 퇴근 시간에 서울로 향하니, 차량 흐름이 원활했다.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왔다 갔다며? 수진이가 눈물 글썽거리면서 얘기하네. 고마워, 내 동생. 운전 조심해서 올라가." 수능 전날 탓인지 쌀쌀해진 날씨와는 달리, J의 마음은 봄 햇살처럼 포근했다. 울 일이 아닌 것 같은데도 묘하게 눈물이 났다. 아이를 낳고 경험한 엄마의 마음과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 어우러진 눈물이었다.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는 J의 눈물을 이해해왔다. “엄마가 없으면 이모가 엄마지”라는 전언이 그 증표다.  (끝)

 

 

[사족]

1.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친밀한 가족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받는다. (중요한 입시처럼) 부담되는 인생사 앞에 선 이들은 가족의 존재 자체로 힘을 얻는다. (중대한 질병처럼) 무서운 인생사 앞에서는 결국 가족만이 인생이라는 여정의 길동무가 된다. (자칫 연인끼리의 사랑이 더 위대하게 보이곤 하나, 영속적인 면에서 가족간의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세상에는 깨어진 가정이 많고,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부모님도 많지만, 어두운 이면은 연인관계도 마찬가지다.)

 

2.

자신의 자녀를 둔 이모는 독특한 존재다. 아이를 낳으면서 조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존재를 열달 동안 품었다가 세상에 내어놓고 나면, 여자는 엄마가 된다. 자신도 설명못할 생명의 신비를 겪은 것이다. 엄마들은 단어로만 알던 가치, 사랑과 책임감을 온 몸으로 이해한다. 다시는 아이를 낳던 이전의 몸과 환경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일종의 굴레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삶의 신비 하나를 오롯히 경험한다. 자매간의 애정과 엄마로서의 감수성이 결합되면 또 하나의 귀한 사랑이 되는데, 그것이 이모다.

 

3.

그 누구보다 가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고서 용서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나처럼 젊은 나이에 친부, 친모가 모두 돌아가셨거나 피를 나눈 형제가 없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한번뿐인 삶을 유복한 가정에서 살지 못함은 아쉬운 일이지만 숙명을 감히 어쩌겠는가. 삶은 운명애(아모르 파티)를 품은 이들에게 언제나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어떤 친구나 지인은 진정한 길동무가 된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표현할 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쓴다. 피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나눈 사람이라면, 그는 또 하나의 가족이다.

 

4.

오늘로 고3 수험생들의 고생은 끝난다. 앞으로도 인생살이의 수고와 고생은 연령대마다 찾아들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훗날에 붙들 문제다. 누구도 허들을 미리 넘을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10대의 끝자락에 선 그들이 당분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기쁨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20일 남짓 후에 받아들게 될 성적표가 표현못할 기쁨과 얼마간의 좌절을 주겠지만, 그것이 인생의 최종 성적표에 미칠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20대의 10년은 모든 상황을 전복시키고 인생을 새롭게 창조할 놀라운 시절이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은 20대 같은 열정으로 10년을 살아갈 모든 나이 든 이상주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리라.

 

'™ My Story > 짧은소설 긴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물  (0) 2016.03.01
관리  (0) 2016.02.24
성찰과 피드백  (0) 2015.11.03
기만  (0) 2015.08.24
합작품  (2) 201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