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자유롭게 하루 종일

카잔 2015. 11. 15. 09:24

"2009년 여름, 알랭 드 보통은 히드로 공항 관계자의 초청을 받았다. 공항의 첫 '상주작가'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이 공항을 전례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민족과 계층의 여행자들을 만났다. 또한 수하물 담당자로부터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공항 교회의 목사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란 책은 이 매력적이고 이색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다. (인용문은 책 날개에서 따왔다.)

 

왜 매력적인가? 알랭 드 보통에게 공항은 중요한 공간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의 현대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공항밖에 없을 것이다." 보통의 말이다. 그의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1993)는 비행기에서 만난 클로이와의 만남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였다. 이만하면 알랭 드 보통에게 제안한 책임자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공항 관계자라는 사실이 매력적이지 않은가? 일주일 동안 "공항 한복판에 책상을 가져다놓고, 공항 옆에 붙은 호텔에 묵으며"(옮긴이) 지냈으니 이색적인 작업이고.

 

책날개에서 설명된 이 책의 탄생 배경을 읽자마자, 나는 이러한 제안을 받을 법한 알랭 드 보통의 작가적 위상이 부러웠다. 책의 뒷쪽 책날개에 실린 그의 사진을 한참 쳐다보기도 했다. 두 손으로『A WEEK AT THE AIRPORT』를 들고 난간에 기대 선 알랭 드 보통. 그의 뒤로는 창문 밖으로 푸른색 나무가 보인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이 풍겨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그의 대머리는 제외하고.) 나는 사진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느꼈다. 여유(창문과 나무에서), 미소(그의 얼굴에서), 자신감(표정과 포즈 그리고 그가 아닌 책이 사진의 주인공인 듯한 구도에서).

 

분명 부럽긴 했다.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근사한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제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글을 쓰지 못하는 변명이 될 수는 없음을. 서점에는 이런 제안 없이도 작가의 기획과 전문성 그리고 필력으로 빚어낸 책들이 더욱 많다. 심지어 작가로서의 역량이 좀 부족해도 도전, 근성 그리고 열정으로 탄생한 책들도 많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던 셈이다. 나의 문제는 매력적인 제안의 부재가 아니라 도전의식과 근성의 결여라는 점을.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작가의 첫 책이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했다. 알랭 드 보통의 첫 책은 다분히 독백적인 에세이집이었다. 끌어올 자원과 지닌 명성이 없는 글쟁이에게 독백은 얼마나 유용한 방식인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3년 전 즈음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앉아 책날개의 한 문단을 읽었고, 샤워를 하며 부러움이라는 내 감정을 매만졌고, 몸을 닦고 거실을 오가며 변명 대신 사유를 다듬었다. 그날 나는, 책날개로부터 시작된 이 작은 이야기를 글로 남겨야지 했지만 실천하지는 못했다. 책날개에 쓰인 문구를 읽고 느꼈고 생각했던 당시의 정황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부러움이 컸는지 개인적 결심이 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 감정이 꽤나 강렬했던 것 같다. 

 

인상 깊은 일화도 글로 남겨두지 못하면 잊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기억으로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글이 된다. (기억은 지혜의 탄생에도 상당한 역할을 하기에 나는 '기억'이란 단어에 관심이 많다.) 알랭 드 보통의 책날개 일화는 수년 동안 잊혀지지 않은 기억이다. 기억한다고 해서 항상 의식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지하수처럼 잠재되어 있다. 펌프에 마중물 한 바가지를 넣어 펌프질을 하면 지하수는 지상 밖으로 솟아오른다. 기억에게도 마중물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어느 날 마들렌을 먹었다. 그 순간 옛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미각, 청각 등의 감각적 경험은 기억을 불러오는 주요한 마중물이다.

 

때로는 맛과 향이 아닌 '문장'도 기억을 소생시킨다. 나는 오늘 아침 수잔 손택을 읽었다. 아래의 두 문장이 오늘 나의 '마들렌'이요, 기억의 마중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해 내게 연구비를 제공해 준 록펠러 재단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내 평생 처음 받아본 연구비 덕택에 나는 자유롭게 하루종일 글을 쓸 수 있었다."(『해석에 반대한다』의 '감사의 글'인데, 밑줄 친 구절이 특히 부러웠다.) 이 문장 덕분에 알랭 드 보통과 책날개, 화장실에서의 쪽독서 그리고 당시의 내 감정이 줄줄이 '오늘'이라는 현재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알랭 드 보통의 집필 배경과 비하기에는 초라하지만, 어느 글쟁이에게는 소중한 일화다. 이 소소한 일화를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 수도 있으리라.

 

내게 달린 일이다. 지금의 감정과 생각을 이 글로 소비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음미하고 향유하여 실천으로 이어갈 것인지에 따라 그야말로 (알랭 바디우가 말한 의미에서의) 사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알랭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에서 ‘사건’을 “존재 방식의 변화, 새로운 윤리의식 등을 불러일으킨,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단절”로 설명했다. 나는 요즘 글쟁이로서의 존재 방식, 작업 방식을 변화시켜가고 있는 중이다. 읽으면 쓰고, 쓰면 공개할 것! 이것이 변화의 요체다.

 

손택처럼 연구비를 받지는 못해도, 그리하여 수개월이나 수년 동안 매일 자유롭게 글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나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자유롭게 하루종일' 글을 쓸 수는 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래서 오늘 글쓰기 원칙 하나를 덧붙였다. 딱딱한 원칙에 부드러움을 가미해 줄 만한 원칙이다. 일주일에 최소 한번은 하루 종일 자유롭게 글을 쓸 것! (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답답함이 아닌 후련함의 한숨이다. 글을 쓰는 동안 뻣뻣해져 있던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이다.) 방금 세운 원칙을 상상하기만 해도 부쩍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지만, 나는 이 기만적 황홀감에 나의 실천력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연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