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저를 도와주세요, 엄마

카잔 2016. 9. 17. 18:43

1.

어제는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오후엔 더 많은 비가 올지 모르니 일찌감치 엄마 묘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식구들을 아침잠에 빠져 있었다. TV를 보시는 할머니를 넌지시 채근했다. 할머니 엄마에게 언제 출발할까요? 니 시간될 때 가자. '저는 지금 당장 가고 싶어요'라는 말은 못했다. 잠시 뒤, "전 아침을 안 먹어도 돼요. 어젯밤에 너무 많이 먹어서 한끼를 건너 뛰려고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나 혼자 먹으면 되나?"고 받으셨다. 할머니는 밥 생각이 없으시다며 라면을 끓여드셨고, 나는 송편 3개를 먹었다.


2.

할머니와 나를 태운 자동차가 보슬비를 맞으며 출발했다. 아침 8시 남짓한 시각이었다. "할머니, 일단 한 번 가 봐요. 도착했을 때 갑자기 비가 많이 오면 산에 올라가지 못하겠지만, 잠시 동안 그칠지도 모르니까요." 할머니를 설득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미가 죽은 딸에게 가는 길을 마다하는 모습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갈 테니, 염려 놓으시라는 의도로 드린 일종의 공지사항이었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동기부여가 필요없는 법! 할머니께는 설득이 불필요했다. 나이 드신 몸을 딸에게 데려다 줄 길동무가 필요할 뿐.


3.

차는 남성현 재를 향해 고부랑길을 올랐다. "저는 여기를 오를 때마다 할머니랑 함께 버스를 타고 엄마에게 왔던 기억이 나요. 저기 아래 남성현역 앞에 내려서 한 시간을 걸어올랐잖아요. 무궁화호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갔던 적도 있었고요. 그때도 그립고, 걷던 그 길도 모두 그리울 때가 있어요." 할머니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으셨다. '그 때엔 할머니도 훨씬 젊으셨고요' 라는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세월은 흐른다. 할머니와 함께 어머니 산소를 다니기 시작한 게 벌써 25년이 다 되어가다니!


4.

묘소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 꽃도 안 사왔네." 할머니께서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네,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 늘 있던 꽃장수가 안 나왔더라고요." (성묘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야 꽃장수가 보였다.)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할머니께 우산을 씌워 드리면서 비탈길을 올랐다. 좁은 산길에 바큇자국이 패였다. "차가 올라왔다. 여기." "아마 경운기일 겁니다. 경운기 올라간 걸 몇 번 봤어요." 사실 자동차든 경운기든 문제가 아니었다. 비포장길에 미끄러운 자갈이 많아 행여 넘어지실까 노심초사했다. "할머니, 길이 미끄러워요. 조심하셔야 해요."


5.

"이 길이 점점 힘들어지네." 실제로 할머니께선 오르시자마자 묘 앞에 서기보다는 나무 밑 바위에 걸터 앉으셨다. 내 기억으로는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앉을 자리를 찾으신 건 처음이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져서 돗자리를 펴지 못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여느 때보다 숨이 차시다는 느낌도 진하게 들었다. 할머니 앉으신 곳 위 나뭇가지에 우산을 걸쳐서 임시 처소를 만들어 드렸다. "이러면 비 안 맞으실 거예요. 저는 엄마에게 인사하고 올게요." 혼자 엄마 묘 앞에 섰다. 할머니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


6.

"엄마, 경제적으로 큰 실패를 했거나, 질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힘이 드는 요즘입니다. 엄마도 계시지 않고, 상욱이도 세상을 떠났어요. 무상함이 들지만, 이것이 삶인가 싶습니다. 삶의 의미 문제로 힘든데, 제 성향의 장점을 발휘하여 무상함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 지금의 문제에 직면하여 힘차게 고민할게요. 조상의 힘이나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해서, 도와 달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아직 죽을 정도의 힘겨움이 아니라, 도와 달라는 말은 참 안 떨어지네요. 하지만 도와 주실 수 있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엄마."


7.

엄마에게 이리 길게 말한 적은 드물다. 주로 할머니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니 아들이 이렇게 컸다. 니 보고 있제?" 라고 하시거나 "니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라는 말씀을 끝까지 잇지 못하시거나 눈물을 흘리곤 하신다. 오늘은 내가 울었다. 언젠가는 나 혼자 울게 될 날이 올 것이다. 2016년에도 나는 할머니와 함께 엄마 묘소에 다녀왔다. 하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린 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과 함께 정말 중요한 일을 끝내고 온 기분이다. 할머니가 시간차를 두고 연거푸 말씀하셨다. "속이 후련하다. 이제 당분간 잊을 수 있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