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최승자 시인의 시 <삼십 세>의 도입부다. 어느새 나는 '서른 살' 대신 '마흔 살'을 넣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서른이든 마흔이든 최 시인의 감수성에 공감하는 이들은 존재할 것이다. 누구나 서른 살을 맞지만, 아무나 서른 살을 소재로 울림을 주는 시를 짓지는 못한다. 시인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물론 우리에게도 존재 이유가 있다. 시는 쓰지 않아도 된다.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면 앞으로도 그리 살아가면 될 것이다. 지금의 삶이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면? 그때는 자기 가슴에서 호연지기를 끌어내어 글 짓는 시작(詩作) 대신 새로운 인생을 시작(始作)해야 하리라. 비타 노바의 첫걸음은 작금의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이라 믿는다. 이는 곧 때마다 절실한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서는 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첫 구절이다. 평생 자기실현을 탐구하고 문학으로 도전했던 대문호도 자기다운 삶은 어려웠나 보다. 그렇다, 태초부터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러니 나답게 살지 못했던 날들을 자책하지 말아야겠다. 자기다움은 포획이 아닌 추구의 대상일 것이다. 사냥감을 손에 쥐는 결실이 없더라도 과정에서 배우고 깨달으며 평생 즐기면서 지향하는 삶! 이것이 자기다워지는 여정일 테지. 찾을 때까지 구하려는 노력 자체가 성취다. 삶의 진보를 지향하며 길 위를 걷는 여정이 곧 실현이다.
오늘은 마흔을 사백 사십 사일 앞둔 날이다. 별안간에 다시 꿈을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세부 계획도 세웠다. 지난날 이루지 못한 꿈을 그대로 옮겨 붙일 때는 잠시 자괴감도 맛보았다. 인생의 비전을 수립하면서 Ctrl+C, Ctrl+V 키를 사용하다니! 꽤나 부끄럽지만, 뻔뻔해지기로 했다. 마치 목표를 처음 세우는 사람처럼 행동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꿈이 깃든 문서 하나를 완성했다. 이름하여, '꿈꾸는 마흔'.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에 남겨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마흔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찾아든다. 나 역시 중요한 전환점이라 생각하면서도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두진 못했기 때문이다. '쓴다'는 행위를 나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라고 느끼면서도, 그 존재 이유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했다. 삼십 대의 출발은 제법 황홀했다. 서른 살에 첫 책을 출간했으니까. 이후 몇 년간 출판사의 러브콜이 많았다. 나는 러브콜이 영원하리라 착각했고,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많은 기회를 놓쳤다. 더 이상의 출간은 없었다. 두 권의 공저가 있고, 노트북 데이터를 날려 원고를 유실한 와중에도 세 편의 원고를 완성했지만, 결국 출간까지 이르진 못했다. 출판 계약까지 했던 원고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은 아니야 증후군'이 도져 계약을 파기했던 것이다.
달랑 한 권 출간이라니 (어린이 책과 청소년을 위한 저서가 있지만, 단독 저서만큼 애착이 가지는 않으니 '달랑 한 권'인 셈)! 첫 책의 집필 시기가 20대 중후반임을 감안한 글쟁이의 이력으로서는, 삼십 대 전체가 ‘상실의 시대’였다. 줄곧 썼지만, 출간은 없었다. 원고를 유실한 타격이 작지 않았고, 출간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결과다. 아무리 좋게 봐도 삼십 대의 집필 인생은 '절반'의 성공이다. 그 절반이란 것도 이십 대의 후광으로 서른에 출간했던 첫 책 덕분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게 두려웠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의 프롤로그에서 한 말이다(책은 시간 때우기로는 괜찮지만, 내겐 프롤로그 정도만 읽을 만했다). 어느 시기에 성취했더라면 좋았을 일을 해내지 못한 채 세월을 흘려보내는 삶은 씁쓸하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할 때도 많지만, 숫자 그 이상인 경우도 많다. 중년의 사랑은 대학생의 사랑과 다르다. 순수한 감정으로 누군가를 조건없이 사랑하기엔 10~20대가 수월하지 않은가. 학창시절의 어학 공부와 노년의 어학 공부 또한 효과나 성취가 다를 것이다. 때론 나이가 엄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몇 살엔 졸업하고 몇 살에 결혼해야 한다는 인생살이의 절대적 시간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일에는 가장 효과적인 적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 걸음씩 뒤늦게 깨닫거나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곧잘 적기를 놓치며 살았다. 중요한 때를 모르는, 그야말로 철부지였다. 이를 간파한 스승은 당신의 책을 건네시며 서명과 함께 귀한 문장을 적어 주셨다.
"한걸음씩 늦는구나. 너무 늦진 마라."
둘째 문장은 나의 해석이다. 스승께선 그저 "늦지 마라"고 쓰셨지만, 나는 도무지 빠를 수가 없는 인간이라 '너무 늦지는 말자'는 문장으로 고쳐 가슴에 새겼다. 스승의 뜻을 곡해한 것이 아니길 바라는 동시에 나로선 도저히 해낼 수가 없는 수준까지 노력해 보자는 마음이다. 나다운 삶을 도울 최선의 적용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랄까.
하루키는 헛되이 보낸 세월이 무섭지 나이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지만, 나는 둘 다 두렵다. 나이듦 자체가 두렵다는 말은 아니다. 나의 인생살이는 나이듦과 허송세월이 하나로 얽혀있어 둘의 구별이 힘들다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뒤늦게 깨치고 느즈막이 실행하는 사람이다. 스무 살의 할 일을 서른에야 착수하고, 서른 살의 역할을 마흔에야 해낼까봐 슬쩍 겁이 난다. 마흔 무렵이면 타고난 성향에 투쟁하는 동시에 십분 받아들이면서 일말의 겁조차 떨쳐내면 좋겠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체 게바라
20대 중반에 체 게바라 평전을 뜨거운 가슴으로 읽었다(장 코르미에, 실천문학사).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저 문장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느 독자는 인터넷 서점에다 "이런 책 한 권쯤은 집에 있어야지요"라고 썼더라. 깊이 동의한다. 특히 20대의 서재라면, 니체, 마르크스, 체 게바라의 정신이 꽂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내 서재엔 저이들의 책이 고스란히 꽂혀 있다. 도전, 혁신, 창조라는 단어가 20대의 청춘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지!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아가니 평생 소장하지 않을까 싶다.
20대엔 "나는 꿈꾸는 청년입니다" 류의 패기 넘치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글을 썼다. 지금은 그때처럼 쓰기는 힘들다. 그래서 오늘의 회한과 한 줌의 열정을 붙잡고 싶었다. 내 생에 가장 젊은 오늘이 죄다 흘러가기 전에 꿈을 꾼 것이다. 나의 자그마한 세상에다 외쳐 본다.
"나는 다시 꿈을 꿉니다. 패기가 시들해 보인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현실을 직시할 때마다 잠시 움츠러들곤 하니까요. 어쩌면 좋은 일이겠지요. 패기가 성취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현실인식이 일궈내는 일들도 있잖아요. 현실이 버거울 때도 나는 여전히 꿈을 꿉니다. 삶이 버겁기에 꿈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네요. 오늘도 꿈을 꿉니다. 가깝게는 마흔을 황홀한 기쁨으로 맞겠다는 꿈을, 멀게는 제법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난주엔 두 개의 도전을 감행했다. 탈고 직전의 원고를 투고했다. 다음의 메시지와 함께. "관심 있는 출판사와 마무리 작업을 함께 하고 싶어서 저자 기준에서 90% 완성된 원고를 보냅니다." 이러한 방식의 투고는 완벽주의가 심한 내게는 변화였고 용기였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쓴 비평 에세이를 그 작가에게 보내기도 했다. 보낼 때도 떨렸고, 생각하는 지금도 떨린다. 스스로 응원해야 할 때다. 응답이 없고 실패를 겪더라도 거듭 도전하기를! 오늘 품은 꿈을 모두 이룰 때까지 부지런히 행진하기를! 진정한 생을 위해 부디 더 많이 넘어지고 더 많이 부딪치기를!
스물아홉의 나는 서른을 불청객처럼 맞았다. 서른여덟의 나는 마흔을 다르게 맞이하고 싶다. 오랫동안 바라던 비타 노바를 실현하고 싶다. 마흔이라는 미답의 나이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인생이라는 미지의 세계엔 발 벗고 뛰어들고 싶다. 호기를 기다릴 필요없다. 도전을 미룰 필요도 없다. 언제든 어디에 있든 오늘이야말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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