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한 가족의 범지구적 민폐기

카잔 2010. 4. 2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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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개봉일 : 2009. 11. 12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출연 : 존 쿠삭 (잭슨 커티스), 아만다 피트
   (케이트 커티스), 치웨텔 에지오포(애드리언 헬슬리)

관람 : 2010년 4월 11일, 관광버스

평점 : ★★★★

간단평 : 스펙타클한 재난 장면은 정말 압권임.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 걸 후회할 정도로. 짜릿한 스릴과 거대한 스케일을 즐겼음. 반면, 매력없는 주인공 가족 대신 감동적인 몇몇 조연들로부터 희망과 에너지를 얻었음.


누구를 구할 것인가?

이 영화가 <투모로우> 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것은 관람 후, 기사를 검색하며 알게 되었다. 롤랜드 에머리히를 재난 영화 전문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는 않다. 같은 소재지만, 표현하고 싶은 것은 매번 다를 수 있다. <2012>의 소재는 종합재난세트로 구성되어 있지만, 감독이 말한 영화의 초점은 재난이 아니라, 재난 그 이후다. "누구를 구할 것인가?" 이것이 영화가 보여 주려는 하나의 메시지다.

"새로운 세상 만드는 데 늙은 정치가보다
젊은 과학자가 필요하지."

-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며

결국, 대통령은 죽는다. 희생적인 모습이 퍽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동체에는 현명하고 헌신적인 리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아의 방주'에는 선장은 있지만 실제적인 리더가 없었다. 최고의 지위를 가진 자가 아니라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이 리더다. 리더는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의 리더의 말을 따르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는 문을 닫기 직전,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결국, 生의 기회를 준다. 그것은 젊은 과학자의 다음과 같은 양심어린 호소 때문이었다. 그 순간엔 그가 리더였다. 누구를 구할 것인가? 나는 하나의 대답은 할 수 있겠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헌신적인 리더!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두당 10억 유로의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구원해서는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
 
"남들이 흘린 피 위에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선 안 됩니다."


가족의 의미 = 우리의 생존기반

주인공 가족은 매력적이지 않다. 주인공 잭슨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한 소설가다.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몹쓸 남편이다. 결국 이혼을 당했다.  "당신에게는 모든 게 뒷전이고 글만 써댔잖아. 우린 내댕동이쳤잖아요." 일과 삶의 균형을 놓친 가장, 연민이 가지만 전혀 닮고 싶지 않은 주인공이다. 게다가 주인공 가족은 오직 자신들만의 구원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린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스펙타클한 재난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주인공 가족의 가족 이기주의 역시 스펙타클하다.

주인공 가족에 비해 티벳에서 만난 불교를 믿는 어느 한 가족의 모습이 빛났다. 불교 가족의 장남은 노아의 방주 호 건설에 참여한 인부였다. 그래서 그 가족은 방주에 올라타는 길을 알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 가족을 만난다. 주인공 가족까지 들어갈 수는 없다고 제지당했을 때, 불교 가족의 리더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대지의 형제라고.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 시민주의)의 모습을 보여 준 장면, 내게는 무척 인상 깊었다. 주인공 가족에게 기대한 것을, 이렇게 다른 가족에게서라도 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 모두 대지의 형제다
불교 신자로서 저들이 죽는 걸 모른 체 할 수 없다."


주인공 가족이 보여 준 것은 전혀 없지는 않다. 가족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했다. 영화는 노아의 방주에 무사히 탑승한 가족의 1년 6개월(?) 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난다. 잭슨 커티스와 딸의 대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딸이 묻는다. 아빠, 우리는 언제 집으로 가? 아버지가 대답한다.

"가족이 있는 곳이 바로 집이지"

그의 말은 정답이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중한 병에 걸리거나, 힘겨운 일이 당했을 때 우리는 늘 깨닫게 된다. 가족의 소중함을. 가족은 우리의 생존기반이다. 공룡은 자신의 생존기반인 숲을 매일 엄청나게 먹어치웠다. 생존기반의 지속가능성을 묻는 지혜가 없었다. 생존 기반을 돌보지 못하는 종은 언젠가는 멸종되는 것이 자연의 역사였다. 지금 우리는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물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거시적인 생존 기반이라면 가족은 미시적이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생존기반일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이 영화를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선생님과 연구원들이 함께한 MT 를 다녀오는 관광버스 안에서 관람했다. (관광버스 안의 영상시설이 꽤 좋았다.) MT 를 통해 우리는 열심히 글을 쓰자는 마인드를 공유했다. 영화를 보다가 휴게소에서 쉴 때, 선생님께 농담조로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부님,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글을 쓰면 뭐 하나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고, 옆에 있던 선배 연구원이 내 말을 받아주었다. "선생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저는 오늘 한 편의 글을 쓰겠습니다." 선배의 더욱 재치있는 말에 함께 있던 연구원들은 웃을 수 있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사람은 스피노자였던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의 生을 흔들림 없이 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 인생일 터이니 스피노자가 말한 방식의 삶이 옳을 것이다. 재난 영화에서 으례 자신의 일을 끝까지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타이타닉>에서 침몰 직전까지 찬송가를 연주하던 바이올니스트들, <2012>에서 해일에 휩쓸려 가기 직전까지 종을 치던 승려. 그렇다면 작가를 꿈꾸는 나의 최후는 모니터 앞이 될 것인가? 그보다는 책을 읽다가 기도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공부하는 작가로서 '공부'에 초점을 두고 싶으니까.

19대 대통령 선거도 꼭 해야겠지요. MB를 생각하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