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빚을 진다는 것

카잔 2010. 9. 26. 21:56

2008년 12월이었던가. 대학 다니며 책 산다고 빌린 돈과
취직하며 혼자 살아갈 방 구한다고 빌린 돈을 모두 갚았던 때가.
천오백만원이 넘는 돈을 모두 갚았을 때, 나는 짜릿했다.
그것은 자유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군대에서 얼차려를 받다가 풀려 났을 때 느껴지는 자유,
혹한기 훈련이 끝나고 자대로 돌아올 때의 자유 같은 것이었다.
훈련이 다가오면 막막해지고 갑갑해진다. 그 갑갑함으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반면 매달 갚아야 할 빚이 있을 때의 감정은
혹한기 훈련을 앞두고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러니 빚을 진다는 것은 가난과는 다른 문제다.
빚은 은근히 자유를 제한하고 죄책감을 동반한다.  
빚이 있었을 때에는 물건을 살 때마다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요즘 내 삶에 여유가 사라지고, 가슴이 갑갑할 때가 있는데,
그 원인이 아마도 빚 때문인 것 같다.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추석 연휴 첫 날에 마트에 가서 샀던 오렌지 주스다.
'365 유기농 아침 오렌지'라는 브랜드의 이 주스는 여느 주스보다 많이 비쌌다.
유기농이어서 그런가 보다. 몸에 좋겠지, 싶어 비쌌지만 구입했다.
비싼 주스라 아껴 두었다. 오늘 집에 돌아와 문득 유통기한을 확인해 보았다.
PET 병에 든 것은 대개 유통기한이 넉넉하지만,
혹시 '유기농'이라 다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헉.
2010. 09. 24
라고 적힌 검은색으로 인쇄된 숫자가 용기 상단에 있었다.
엥? 그저껜데. 이거 뭐지? 처음엔 제조년월일인가 싶었다.
다급한 마음에 확인했는데, 아.뿔.싸. 유통기한이란다.
아껴 먹으려고 개봉하지도 않았던 것아 아쉬웠다.
내가 누군가. 막강 체력의 사나이 아닌가. 그래서 뚜껑을 열어 마셨다. 두 잔을.

이것도 빚 때문일까? 하하하. 그래도 헝그리 정신을 갖게 되어 좋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미친 정신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나는 지금 허리띠를 졸라 매려는 중이니까.
살다 보니, 빚이 생겼다. 다시 빚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삶은 종종 내 뜻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좋은 점이 있다. 다시 치열하게 한 번 살아보는 거다.
사실, 이런 치열함이 잠깐 반짝이다가 금새 사그라들까 봐 걱정이다.

빌려 준 돈과 갚아야 할 돈이 비슷하니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면 딱 좋겠다. 하하. ^^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니, 우선 헤픈 씀씀이부터 좀 줄여야겠다.
사실, 이 글을 쓰자니 무지 부끄럽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 탄로날까 봐.
이사가기 위해, 집을 알아보는 중인데 부동산에 들어갈 때면
난 좀 거들먹거리곤 한다. 그 역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것처럼 모이기 위해서다.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해서, 이제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살련다.

지금 막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더 마셨다.
맛이 좀 다르긴 한데, '유기농'이어서 그런 것인지
'유통기한'이 지나서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신선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혹시 유기농이라 유통기한이 하루 이틀 지나도 괜찮다는 말이 적혀 있지 않을까
하여 용기의 글씨들을 찬찬히 살폈다. 헐 괜히 봤다. 이런 게 적혔네.
"개봉 후에도 반드시 세워서 냉장보관하시고
유통기한 이내라도 빠른 시일 내에 드시기 바랍니다."

그만 마셔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