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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내가 꿈꾸는 작가의 모습


언젠가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2008년이었나, 2009년 이었나, 아무튼 가을이었다. 나는 노트북의 10년 동안 변함 없었던 '내 문서' 내의 폴더 순서를 바꾸었다. 이전까지는 1) 강의 2) 글쓰기 3) 와우팀원이었던 것을, 1) 글쓰기 2) 와우팀원 3) 강연으로 바꾸었다. 삼십대 초반의 어느 날,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좋은 강연자가 되고 싶다는 꿈보다 커진 것이다. 이 일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을 어느 날 알게 된 것이다.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빨아들인 새싹이 어느 날 흙을 뚫고 세상에 등장한 것처럼. (폴서의 순서는 2010년 7월. CFW 라는 0순위가 생겨나기도 했다.)

내게는 작가가 될 만한 상상력과 통찰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소설이 지닌 인물 묘사와 천명관의 상상력 넘치는 서사를 읽을 때마다, 나는 감탄과 함께 절망을 느낀다. '문필가'라는 단어가 내가 꿈꾸는 글쟁이의 모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드러커가 자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했던 단어인 '문필가'의 사전적 정의는 "글을 지어 발표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문필가가 되려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독창성을 인정 받든지, 통찰력을 인정 받든지 그것은 자기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 차후의 문제다. 자기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기 전에 필요한 일은 자기의 생각을 아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아는가? 아니, (나만의 철학이라 부를 만한) 생각이 있기나 한 건가?

내가 글을 쓰는 목적 하나는 분명히 안다. 라마크리슈나의 평전을 읽다가, 책의 여백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나의 글은 '생산성'을 가득 담은 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산성은 고상하게 들리는 단어가 아닐 것이다. 조금은 천박한 이미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과학에서만 사용하는 단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생산성이라는 단어, 혹은 이 단어가 지닌 의미가 좋다. 투입한 것보다 많은 것을 거둬들이면 생산성이 높은 것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다면, 나는 그가 독서에 들인 시간 그 이상의 가치를 얻어갔으면 좋겠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독서 또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행할 수 있다. 나의 글을 읽는 것이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기를 바란다.

생산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까닭은, 기회비용의 최소화라는 나의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이론이 실제적인 삶의 지혜와는 유리되어 공허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의미와 효용 혹은 에너지와 열정을 생산해내는 글을 쓰고 싶다. 지리산 자락의 옥종이라는 작은 마을의 온천에 갔었다. 유명 스파가 아닌, 허름한 곳이었지만 동네 어르신이 많았다. 온천 탈의장에서 옷장 문을 열면서 동행했던 분이 말했다. "신발장에서 미리 락커 키를 받아올 때는 홀수 번호가 좋은 거 알죠? 홀수 번호가 보통 윗쪽 옷장이거든요." 맞다. 나도 알고 있는 '지혜'다. 그는 덧붙였다. "저는 이런 게 삶의 지혜라고 생각해요." 동의했다. 나는 이런 실제적인 삶의 지혜를 담은 글을 쓰고 싶었다. 강남에서 2호선을 타고 가다가 8호선으로 갈아타려면 열차의 맨 앞쪽에 타면 좋다는 식의 구체적인 지혜를. (이런 정보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자기를 아는 지식 정도만 제외한 세상 대부분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이희석은 실용적인 글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의 전부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나는 실용에 대한 오해를 걷어 내고 싶다. 실용서만이 실용적인 것이 아니다. 철학이나 예술도 얼마든지 실용적일 수 있다. 분명, 철학은 삶을 돕는다. 관념적으로 철학하는 태도가 삶과 유리된 것이지, 철학 자체가 삶에 무익한 것은 아니다. 예술 역시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교양과 무질서』를 쓴 영국의 평론가 매튜 아놀드의 말처럼, 예술은 '삶의 비평' 역할을 한다. 아름다움과 추함, 옳고 그름을 생각하도록 돕는다는 말이다. 나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모든 분야의 텍스트를 정성껏 읽는다. 산만해지지 않으면서도 편협하지 않은 독서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관념적인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관념적인 껍질에 싸여질 수 있다. 나는 다양한 원천을 뒤적여가며 그 껍질을 벗겨 삶에 도움이 되는 지혜를 얻고 싶다.

그렇게 쓰인 나의 글들은, 읽는 이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으면 좋겠다. 내 글의 주제가 꿈이라면 "그래 이제 나의 꿈을 상상해 보자"라고 말했으면 좋겠고, 글의 주제가 리더십이라면 더 나은 리더가 되기 위한 일에 자신을 던졌으면 좋겠다. 실천을 다룬 나의 글을 읽은 이들이 그저 머리를 끄덕이는 것에 그친다면, 아마도 나는 좋지 못한 글을 쓴 것에 대하여 조금은 자괴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실천을 다룬 글을 읽었다면, 책장을 덮고 문을 열어 세상으로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를 흠모하게 된다. 페리클레스가 말을 하면 시민들은 "말을 정말 잘하는군!"하고 칭찬했단다. 하지만, 데모스테네스가 말을 하면 시민들은 "행군하자!"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작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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