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훌쩍 한국여행

매혹을 체험한 울산바위의 雲海

카잔 2011. 11. 30. 09:54

매혹을 체험한 울산바위의 雲海
- 고성 속초, 당일치기 여행기 -

어쩌면 자랑질이 될 지도 모른다. 여행 이야기가 될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의 우정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둘 다 자랑 삼을 만한 이야기다. 난 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라는 소리이거나, 내 주변에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 우쭐하는 것일 테니까.

우리는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속초, 최종 목적지는 설악산 울산바위다. 휴일 오후에 떠나 월요일 밤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오후 4시에 잠실역에서 만나, 잠시 석촌역을 들렀다가 올림픽 대로에 차를 얹어 놓았더니 어느 새 고성군 거진읍에 도착했다. 서울춘천고속도로 - 춘천동홍천고속도로 - 44번 국도 (인제) - 46번 국도 (진부령) 를 거쳤다.

주행시간 2시간 40분. 초보 운전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다. 길 잘못 든 적 없고, 진부령 고개를 넘어설 때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5m 전방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일부 구간은 안개까지 낀 밤길 운전이었지만, 우리는 초보 운전자를 믿었다. 나도 나를 믿었다. 운전을 내가 했다는 말이다.

'우리'라 함은, 와우스토리연구소의 멤버들이다. 나는 이들을 연구원이라 부르고 싶지만, 리더인 나부터 연구에 게으르니 '팀원'이라 부를 때가 많다. 가끔 폼을 잡아야 할 때에만 '연구원'이라고 부른다. 난 호칭에 민감한 편이 아니니까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호칭하는 편이다.

40대 중반, 30대 중반의 사내 둘 그리고 30대 초반, 20대 후반의 처자 둘. 우리의 구성원이다. 한 차에 타기 좋은 인원이다. 우리는 거진에 사는 와우 연구원을 만나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목적지는 속초지만, 거진에 갔던 까닭이다. 오랜만에 밥도 같이 먹고 밤새 이야기도 나누려 했지만, 밤을 새진 못했다. 나는 12시 30분 즈음에 잠들어 버렸으니까.

연구원들은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데, 모두들 일찍 깨어났다. 느긋하게 짐을 정리하고 9시 30분에 숙소를 나섰다. 수원에서 출발하여 속초로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연구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밤새 아이가 아파 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노는 걸 참 좋아하는 그이였지만, 아이가 아프면 어쩔 수 없다. 부모의 사랑과 책임감은 자기를 넘어서게 한다.

우리의 '원래' 일정은 울산바위 산행과 설악워터피아(한화리조트)에서 몰놀이를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를 하면서 워터피아 대신 고성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울산바위로 가자고 합의했다. 이 분들, 어디를 가든 '우리니까 좋다'는 예쁜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리더인 나를 무지하게 존중해 주시는 모습이기도 했다. 고마웠다. 무지.

거진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성진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었다. 맑은 국물의 생태찌개가 칼칼하고 시원한 맛을 내니 해장으로 제격이다. 생태, 동태, 북어 등 가공상태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명태. 지구온난화 때문에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 잡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한 연구원의 말에 입맛이 더해졌다.

식탁의 분위기를 돋구는 말이었다. "에이, 이 집은 (이래서 저래서) 맛이 별로네" 라고 말하며 자신의 입맛이나 식도락 경험을 과시하는 평가는 '있던 입맛'도 가시게 만드는 반면, 이렇게 은근히 음식 맛을 돋구는 말도 있구나! 상대를 화나게 하는 말과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 있듯이 음식 맛을 떨어지게 하는 말과 입맛을 돋구는 말도 있음을 느꼈다.


식당 벽면에 걸린 고성 8경 관광지도를 보며, 일정을 정했다. 화진포, 천학정, 청간정 그리고 울산바위가 우리의 여정이다. 나름 동선과 시간을 고려한, 하루 풀타임 일정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거진 읍내에서 차로 7~8분 거리에 있는 화진포로 향했다. 고성 제3경인 화진포는 호안선 길이가 16km나 되는 자연호수다.


우리 나라에 김일성 별장이 있다?!

화진포에는 김일성 별장이 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화진포가 북한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가족과 함께 자주 찾았다는 건물이 화진포의 동쪽 연안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도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 풍광은 스쳐지나간 정도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화진포가 절경이었다.


최고 권력자들의 별장이 있는 화진포. 우리는 호안을 따라 나 있는 아담한 도로를 따라 서거니 가거니 하며 화진포를 구경했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몽롱한 분위기를 안겨다 주었고, 이름모를 철새들의 합창소리는 내가 여행지에 있음을 알려 주었다.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에서 보아 익숙했던 분위기였지만, 풍광은 화진포가 한 수 위라 생각되었다.

여행한 날은 흐린 날씨였지만, 기상관측 사상 11월의 기온으로는 최고 고온이었던 날이다. 11월 말의 포근한 날씨라! 화진포에 하염없이 머무르고 싶기도 했다. 아마도 나 혼자만의 여행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행이 있기에 그리고 다음 일정이 있기에 차에 올라탔다. 여인 둘은 한참동안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분위기를 더해 주려고, 차 안의 오디오를 틀었다.

"여기에 더 머물까요?"라고 묻지는 않았다. '적당히'는 애매한 말이지만, 중요한 단어다. 여행 가이드에게도 그렇다. 어디 가실래요? 10분 더 머무실래요? 라고 한 두 번은 물을 수 있다. 적당히, 라는 기준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민주적인 가이드다. 하지만 이렇게 매번 묻는다면 짜증 날 것이다. 나는 자주 묻는 편이다. 그러니 짜증 나기 직전까지, 다시 말해 적당히 물으려고 노력한다.

천학정과 교암리 앞 바다

화진포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지점에 천학정이 있다. 그리고 다시 3km 내려가면 청간정이 있다. 천학정은 일출로 유명하단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12시였으니, 구름 사이로 간간이 드러나는 햇빛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기암 괴석이 있어 천학정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광이 색다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하조대와 비슷했다.


천학정 앞 바다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첨벙 뛰어들어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다. '수중금강산'이라 불릴 정도로 해저 산맥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 산맥의 크기가 국내 최대의 울산바위에 견줄 정도라니 하니, 스쿠버다이빙 명소라 불릴 만 하다. 해저 산맥의 계곡마다 형형색색의 산호숲을 들여다 보고, 설악산의 울산바위에 오르면 멋진 여행이 될 것 같다.

천학정이 있는 곳의 지명은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다. 교암리 앞 바다, 언젠가 스쿠버다이버가 되면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천학정은 마음에 큰 울림은 없었다. 천학정이 있는 작은 산의 뒷쪽에는 100년이 넘은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고 하나, 군사적인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아쉬움을 안고 청간정으로 향했다.

청간정이 사라졌다!

2010년 봄, 관동8경에 걸맞는 청간정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했던 기억을 안고 다시 청간정을 찾았다. 청간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의 시원한 백사장과 저 멀리 설악산의 눈 덮인 봉우리를 기대했다. 하지만 안개와 구름이 많은 날씨로 인해 설악산이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청간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공사장에서나 있어야 할 철골 구조물이 청간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청간정은 지금 해체/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해체? 그러면 모두 덜어냈다는 말인가, 싶었는데 정말 해체였다. 당일 날에 즉흥적으로 계획한 여행 일정이라 돌발 상황이야 있겠지만, 버스 시간표가 바뀌거나 가려고 했던 식당이 쉬는 날인 정도가 아니라, 청간정이 몽땅 사라져버린 상황이라니! 일정을 함께 조정하긴 했지만, 연구원들에게 괜히 조금 미안했다.

오랜 시간동안 해풍에 시달려 초석이 기울어지고, 노후된 정자가 붕괴될 우려가 있어 해체하여 복원하는 것이라 한다. 청간정에 오르는 계단을 밟지도 못하고, 청간정 앞 바닷가로 향했다. 물이 매우 맑아 인상 깊었던 청간정 앞 바다였다. 백사장 모래가 굵고 해안가에 낮고 작은 바위섬이 있어 묘한 풍광이 있는 곳이다. 연구원들은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곳에서 말을 잃고 제각기 떨어져 30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바위 이곳 저곳을 건너 다니며 바닷물을 구경하는 이, 저만치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줍는 이, 해안을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는 이, 그리고 이들이 무얼 하는지 궁금해하며 구경하는 이. 우리는 저마다 맑은 바다와 멋진 풍광이 안겨다 준 시간을 즐기었다.



청간정 입구에 있는 화장실이 이곳에 참 어울린다 싶었는데, 행정안전부가 주최하는 제13회 아름다운화장실 공모전에서 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었다. 공사는 올해 연말까지 계속된다. 혹여나 공사 소식을 알지 못하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청간정을 눈으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화장실에서라도 풀기를 바래어 본다.

흔들바위는 정말 흔들리나요?

오후 2시 05분. 설악산 매표소를 지날 때의 시각이다. 서둘러 다녀오면 울산바위에 갔다가 6시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5시 30분 무렵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하겠지만, 그 시각이면 돌길은 거의 내려온 셈이니 괜찮을 것이다. 올해 초에 울산바위에 다녀왔으니 소요될 시간과 산행코스가 얼추 눈에 그려졌다.

문제는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김밥과 과일 등을 사서 산에서 식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울산바위에 도착해 버렸다. 그래서 식사를 하고 가기로 결정했다. 산채비빔밥과 파전 그리고 옥수수막걸리를 한 잔씩 먹었다. 일단 먹고 보자는 심산이었고, 서두르면 4시간 이내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3시 10분에 신흥사를 출발했다. 올해 여름, 와우 연구원들과 설악산 비룡폭포에 올랐을 때 이야기 했나 보다. 울산바위에 오르는 철계단이 내년에는 폐쇄될 거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랬더니 연구원 L이 울산바위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L의 '자기 인생 최고의 빡센 산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약간의 긴장감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4시간 코스를 오후 3시에 시작했으니까. 그 기분은 묘했다. 신비로운 하지만 조금은 두려운 동굴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5시에 울산바위에 도착할 테고, 그러면 내려올 때 어둠을 맞겠는 걸.'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다행인 것은 모두들 별다른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속으로만 걱정하셨나?

"우리는 울산바위에 4시 45분~50분 사이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몸이 뒤틀리니, '내가 이 길을 좀 안다'는 내 방식대로의 내색이었다. 산길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평지는 속보로 걸었다. 쉬운 길에서 시간을 앞당기자는 생각이지만, 이내 L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마지막에 지치면 더욱 힘들테니 페이스를 늦췄다.


정말 흔들릴까요? 흔들바위에 다다를 무렵, 한 분이 물었다. 글쎄요. 우리는 잠시 뒤에 확인했다. 셋이서 영차영차 밀었다. 흔들렸다. 육중한 바위가 흔들렸다. 사실, 영차영차 힘을 모을 필요도 없었다. 여인 혼자서 밀어도 바위가 흔들렸으니까. 우리는 아직 힘을 쓸 수 있었다. 자주 쉬어가며 온 덕분인지 너끈하게 흔들바위까지 도착했다.


흔들바위와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찰칵, 찍으며 잠시 쉬었다가 울산바위로 향했다. 쉬는 주기도 쉬는 시간도 조금씩 많아졌다. 하지만, 결코 느긋한 산행은 아니었다. 여인들에게 조금 힘이 든 줄 알면서도 많이 쉬지는 않았다. 늦은 산행 시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즐길 것은 즐겼다. 줄곧 정상만 보며 가지는 못하는 게 우리의 산행 방식인 듯 했다.

널찍한 바위가 있으면 그 위에 잠시 누워 보기도 하고, 멋진 나무가 있으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울산바위가 잘 올려다 보이는 지점마다 서서 올려다 보기도 했다. 울산바위 철계단이 시작되기 직전에 산등성이로 몰려오는 운해(雲海)의 풍광은 그 중에서도 절정이었다. 운해가 설악산의 계곡과 산등성이를 스멀스멀 잡아먹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매혹을 체험한 울산바위

한참을 구경하다 우리는 철계단에 올랐다. 철계단에 오른 기념으로 사진 한장씩 찍고,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다들 고소에서 느끼는 아찔함을 붙잡고 하나 둘씩 오르기 시작했다. 쉽게 정상을 내놓지 않은 산일수록 정상에 서는 맛이 짜릿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 씩씩하게 올랐다. 20여 분을 올라 드디어 울산바위 정상에 섰다. 5시 05분 도착.


대명리조트와 속초 시내 그리고 동해가 펼쳐질 거라 예상했던 울산바위의 정상 풍광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듯 했다. 푸른 바다 대신 은빛 구름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운해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구름마차였고, 우리는 산신령이라도 된 듯 했다. 모두들 이 풍광에 넋을 잃었다.
 

"청간정 앞 바다에 한 번 감탄하고, 울산바위에서 한 번 또 감탄하게 되네요." 한 연구원의 말이다. 그 말에 멋진 풍광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그 분에겐 좋은 여행이 된 것 같아 기쁨이 몰려왔다. 연신 셔터를 누르며 기념 사진을 찍고, 가만히 운해를 내려다 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오르는 길에 만났던 젊은 커플이 먼저 내려갔다. 이제 울산바위엔 우리 넷만 남았다.

우리는 울산바위 정상에서 20분 가까이 머물렀다.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것이 매혹이다.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잘 인지하는 축에 속한다. 시간 감각이 있어서 얼마나 지났는지, 얼마나 걸릴지를 잘 예측한다. 그런데 20분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났다.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영역, 시간을 상실한 것만 같은 그 지점을 모리스 블랑쇼는 '매혹'이라 말했다.

자기실현의 길은 결국, 자신을 매혹시키는 일을 찾는 여정이다. 많은 장인들과 프로페셔널들도 결국, 자기 일에 매혹당하며 일하기를 꿈꾼다. 매혹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20분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여유로운 주말 오후의 20분이 아니라 어둑어둑해져 오는 설악산 울산바위에서의 20분이다.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매혹의 힘이다.

잊지 못할 야간 산행

5시 25분. 울산바위를 뒤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아직은 밝다. 20분을 내려왔으려나? 철계단이 끝나고 조금 내려오다보니, 뒤에 따르는 연구원 한 명이 휴대폰 후레쉬를 켰다. 어둑어둑해진 것이다. "지금은 끄자. 있다가 더 캄캄해지면 그 때 더욱 필요할 꺼야." 걱정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두 번째 메시지였다. 순순히 따라주었다. 고마웠다.

이제 겨우 울산바위를 내려왔을 뿐인데,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으니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은 자신있게 후레쉬를 지금은 끄자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휴대폰이 4개나 있었으니 휴대폰 배터리가 충분함을 그 때엔 몰랐다. 무엇보다 마음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산은 이내 어두워졌다. 5시 30분에 어둑어둑해지더니 6시가 되기도 전에 밤이 된 것이다. 다행이었다. 나는 칠흙같이 캄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밤눈이 밝지 않은 나에게도 돌길이 보이는 정도였다. 넘어져도 다시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발을 내딛으니 하산 속도가 대낮일 때와 별반 차이 없었다. 리더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두려워하면 여인들도 겁을 낼까 봐 용기를 내어 걷기도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연구원들은 핸드폰 랜턴을 밝혔다. 참 좋은 기능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밝아 하나만 켜도 네 사람의 발길을 모두 비춰주었으니. 혹시라도 다른 길에 들어설까 봐 갈림길마다 주의해 가며 힘차게 내려왔다. "넷이니까 무섭지 않다" 쉬면서 한 사람이 말했다. "두 사람이라면 조금 무서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만약, 혼자라면?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절대 그런 일은 맞이할 필요도 없고 맞이해서도 안 된다. 혼자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우리는 그렇게 야간 하산을 계속했다. 생각해 보면, 별 일도 아니다. 울산바위로 오가는 길을 잘못 들 가능성이 낮으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는 큰 일이기도 했다. 산에 자주 오는 사람도 아닌데, 캄캄한 밤에 하산을 했으니까.

L에게 물었다. "이번 산행은 좀 험난한 편이겠네?" 그가 답했다. "좀이 아니라, 제 인생에 최고로 험난했지요."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불평이 아니라, 어떤 성취감이 묻어나는 듯 했다. 피곤함도 느껴졌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는 느낌도 있었다. 이런 질문이 오간 것은 신흥사를 눈 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별 탈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으로 주고 받은 대화였다.

7시 10분에 매표소 앞 광장에 도착했다. 울산바위에서 신흥사까지 1시간 40분 만에 내려온 셈이다. 여인들에게 고마웠다. 내려올 때 다리가 풀렸고 밤이 되었는데도 힘든 내색 않고 끝까지 힘을 내 주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인 분에게도 고마웠다. 손 아래 사람인 나를 여행 내내 존중해 주고 따라 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대포항에서 회덮밥과 물회를 한그릇씩 먹고 자동차에 올라탔다. 피곤하여 잠이 올까 봐, 속초 시내에 있는 클래스 300 호텔 앞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하나 샀다. 이제 서울로 출발하면 된다. 8시 55분이었다. 연구원들이 잠을 자는 사이, 초보 운전자는 신나게 달렸다. 안개 가득한 미시령 고개, 인제, 홍천, 춘천을 지나 서울 잠실역에 도착한 시각은 10시 50분이었다.

속초 시내에서 서울 잠실까지 1시 55분 만에 다다른 것을 보니, 속초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대전까지 140km, 속초까지 160km인데 그간 마음의 거리로는 속초가 꽤 멀었다. 초보운전자야, 고생했다! 차를 탄 사람들은 종종 이 초보 운전자를 보고 말한다. 초보 같지 않다고. 얼핏 10년 경력처럼 보인단다. 그 식견에 보답이라도 하듯 신나게 달려왔다.

강원도 고성에서 오전 9시 30분에 여행을 시작하여 서울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정각이다. 오늘 아침, 서울에서 7시에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16시간짜리 여행이었다. "울산바위 내려올 때엔 몸이 힘들긴 했지만, 느긋하게 빡센 여행이었어요." 한 연구원의 말이다. 여유도 있으면서 많은 곳을 둘러 본 여행이었다. 잠을 자야하는 8시간까지 포함하면 딱 하루짜리 여행이다.

하루는 긴 시간이다. 8시간을 자고서도 속초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다. 울산바위를 넉넉하게 보고 관동 8경의 하나인 청간정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다. 화진포까지는 40여 분은 가야 하니 화진포 대신 속초 시내의 아바이마을을 갯배타고 다녀올 수도 있다. 이 모든 명소를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이다. 하루, 24시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우리의 위대한 자산이다.

마음이 통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람과의 여행은 즐겁다. 물론, 동행을 배려하고 마음을 헤아리느라 홀로 떠나는 여행과는 다른 모양이 되지만, 함께 떠나는 여행은 서로에게 언제나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이 되고 더 깊은 우정이 된다.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편하고 진실한 여행 동무가 되어 준다는 사실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함께 해 준 고마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컨설트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