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훌쩍 한국여행

환상적인 부석사 여행

카잔 2010. 11. 11. 15:05

10월에 전라남도 장성과 충북 단양에 다녀왔지만, 단풍을 보지는 못했다. 2010년 단풍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떠났다. 내년 단풍은 2010년의 단풍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떠날 이유는 충분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순간을 맛보려는 욕심이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실험하는 일종의 도전이다. 나는 매주 1회 여행 떠나기가 과연 현실적이긴 한지, 멋져 보이는 것이 아닌 내 삶에 실제로 유익한지 따져 보는 중이다. 그 따짐이란, 현명함과 위험함이라는 두 극단을 연결하는 스펙트럼 위에서 내가 위치하고 싶은 건강한 중간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욕심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추구하는 것은 현명함이다. 반면, 욕심이 지나치면 위험해진다.

욕심을 쫓고, 실험을 한다는 것은 명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LP가 좋아서 떠났다. (LP는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들 비밀 프로젝트의 약어임) 좋아서 떠난 것은 분명한데, 내 마음의 기저를 살펴 보니 저런 이유도 있더라는 것이다. 1박 2일 일정으로 청량리발 영주행 중앙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KTX를 탔는지, 새마을호를 탔는지 궁금하다면, 당신의 여행지수는 낮다. 당연히 무궁화호다. 청량리역에는 KTX와 새마을호가 없다. 예전에는 새마을호가 있었다고? 맞다. 그러나 2006년도에 폐지되었다. 그 이후로 중앙선이나 영동선을 타 보셨다면 무궁화호밖에 없음을 아실 것이다.

청량리역에는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낭만과 여유가 있다. 내가 청량리역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서울역은 비즈니스 맨이고, 용산역은 한산한 카페 주인이고, 청량리역은 푸근한 시골 아주머니다. 서울역에는 필요에 의해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분주함이 있다. 용산역에서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청량리역이 느림에서 오는 여유라면 용산역의 여유는 넓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공간적 넉넉함 때문이다. 청량리역은 따뜻하고 푸근하다. 스트레스나 부담 대신 설레임과 기대가 있다. 내게는 그렇다. 그러니 감히 말한다. 일년에 한 번은 설레이며 청량리역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열차는 덕소, 양평, 원주, 단양을 지나 풍기역에 나를 내려다 주었다. 단양을 지날 무렵 나타난 멋진 풍광들 덕분에 여정이 지루하지 않았고, 한 달 전에 왔던 단양 8경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새 단풍이 곱게 물들어 산과 물이 더욱 예뻐졌다. 세월따라 예뻐지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소원이다. 내 마음에게 주술이라도 걸고 싶다. 점점 예뻐지거라. 내 삶에 부탁의 말이라도 건네 본다. 부디 아름다워지거라. 부질없다. 어느 CF의 카피처럼 행동이 존재니까. 실천이 곧 삶이다.

이번 여행은 부석사, 소수서원, 선비촌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풍기역에 오후 1시에 도착했으니 점심을 먹고 부석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첫째 날 일정을 정했다. 그렇다. 나는 풍기역에서야 일정을 정했다. 사전 정보만 알아 와서, 여행지에서 즉흥적으로 일정을 정하는 것은 나의 여행 방식이다. 융통성과 준비성 사이에서의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사전 정보가 없는 즉흥성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여행 전 필요한 조사를 꼼꼼히 해야 한다. 반면, 그때그때 마음의 소원을 따르는 융통성이 결여된 계획성은 여행 책자의 정보가 사실인지 체크하는 수준으로 여행의 격이 떨어지고 만다. 나는 나름의 경험으로 사전 정보가 필요할 때와 융통성을 발휘할 때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찰나의 직관을 제대로 발휘되게 만드는 여행 정보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수집해야 하는지를 안다.

풍기역 앞 버스정류장에는 부석사행 버스가 70분 꼴로 한 대가 있었다. 인터넷에서 조사한 대로였다. 그런데 버스 시간표가 게시되어 있진 않았다. 영주에서 출발하여 풍기역과 소수서원을 거쳐 종점인 부석사를 향하는데, 중간 지점의 시간표가 없는 게다. 기점 출발 시각과 종점 도착 시각만 있었다. 내가 조사해 온 정보 중 유용한 것이 있었다. "풍기역에서 부석사까지의 소요 시간은 45분!" 영주에서 부석사까지의 소요시간은 공교롭게도 배차시각과 같은 70분이었다. 그러니 영주에서 풍기역까지는 25분이 걸리는 것이다. 복잡하겠지만, 결론은 이것이다. 나의 계산에 의하면 버스는 오후 2시 35분에 내가 서 있는 정류장을 지나간다. 시계를 보니 1시 40분이다. 넉넉하네.

해장국을 먹었다. 날이 추웠으니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풍기역 앞 거리에는 온통 인삼을 판매하는 집이었고, 음식점이 몇 안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들어선 곳은 음식 맛이 좋았다. 국물 맛이 깊고 진했으니, 그야말로 "끝내줬다". 2시 25분에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10분이나' 남은 시각이지만, 나의 계산이 얼마나 정확할지 모르니 나름 서둘렀다. 아몬드 쵸콜릿 하나를 사서 잠시 앉아 있으려니, 부석사행 버스가 왔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2시 35분이었고, 괜히 우쭐해 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하하하. 이것도 여행의 맛이다. 자아도취 말이다. 기분 좋다.


부석사에 도착하니, 와! 잘 왔다, 는 생각만 들었다. 여행지 선택에 대한 안심이다. 부석사 입구에서부터 단풍이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로폭이 50m는 될 큰 타원형의 연못과 물을 뿜어대는 음악 분수 그리고 오후의 편안한 햇살과 푸른 하늘! 이 모든 것이 나를 반겨 주었다. 다시 시작된다. 멋진 풍광이 수많은 여행자들 중에서 특히나 '나를' 반겨 주고 있다는 자아도취~! 하하하. 신난다. 어쩌면 음악 분수는 음악이 없는 그냥 분수였는지도 모른다. 신이 나다 보니, 그 음악이 내이의 달팽이관을 통해 전해진 실제 소리인지, 내 마음 속에 울려 퍼진 신바람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석사 가는 길


부석사와의 환상적인 첫 만남


사진을 찍고, 펜션에다 여장을 풀고, 다시 사진을 찍고 오뎅 하나를 먹느라 부석사 오르는 길이 늦어졌다. 부석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펼쳐지는 길도 정겹고 예뻤다. 은행과 단풍이 주고 받는 대화는 노랑과 빨강으로 어우러진 길을 만들어냈다. 길을 오르다가 왼쪽으로 입이 열린 부등호(>) 모양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부석사의 전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로 가는 오르막길도 예뻤지만, 부석사 법전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의 감동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그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 시간이 멎은 듯 했다. 나는 멈춰섰고, 벌레가 들어갈 정도로 입을 벌렸다.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기 30여 분 전이라 햇빛은 자신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뽐냈다. 황홀하다는 느낌만이 기억난다. 기억이 많지 않은 것은 내 엉성한 관찰력 탓이기도 하지만, 부석사 전면에 배치된 범종루가 내 넋을 앗아간 탓이기도 하고, 하룻 동안의 제 할 일을 마치고 서산 너머로 휴식하러 가는 석양의 따뜻하고 보람된 미소와 같은 햇살 탓이기도 하다.


정신을 차려 부석사를 둘러보았다. 안양루를 오르기까지 나는 부산하고 분주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이곳 저곳을 둘러 보기도 해야겠고, 빛이 아름다운 순간을 놓칠 수도 없으니 사진도 찍어야 했다. 무량수전이 보이지 않으니 부석사 관람이 아직 남았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도 했고, 분주하게도 했다. 안양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무량수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양루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라고 한다. 내게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익숙한 곳이나, 실제 눈으로 보니 무량수전이라는 이름 외에는 낯설었다. 낯선 이 앞에서 부끄러워하듯,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지도 못하고, 조사당 안의 벽화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와 달리, 답사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 문화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오래 버티며 끈기 있게 관찰하는 것이 나의 특기인데 말이다. 전라남도 장성의 봉암서원에서는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강학당과 동재의 지붕을 번갈아가며 노려 보았던 나였다. (부석사에서도 무량수전의 팔작지붕과 조사당의 맞배지붕을 비교하며 보았지만, 아직 둘을 구분하지는 못한다.) 집중력의 저하는 아마도 날이 저물기 시작했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저물어져가는 햇살을 받은 안양루의 모습, 서산을 절반쯤 넘어간 햇살이 반짝이는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정작 내가 찾았던 무량수전을 비롯한 부석사의 명소들에 관심이 희미해진 것이리라. 여기서 탄로난다. 나는 폼 잡기를 좋아하는 엉터리 문화 유적 답사자란 것이. 문화재와 나라의 보물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아내는 풍광과 여정의 스토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안양루에서 바라본 범종루(오른쪽 아래)




무량수전 정면을 바라보며 서면, 오른쪽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 앞에는 고급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 곁에 가 보니, 왜 그곳에 모여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부석사 전경이 한 눈에 보이고, 저 멀리 태양을 삼킨 산등성이의 모습이 가장 잘 보였다. 그들 따라 흉내내어 나도 석양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런! 점점 부석사로부터 관심을 잃어가는 모양이란!


해가 넘어가자 마자, 서둘러 삼층석탑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올랐다. 조사당으로 향하는 길이다. 무량수전이 국보 18호요, 조사당이 국보 19호니 둘러 봐야지! 강남역에서 우리 집으로 가려면, 역삼역 - 선릉역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조사당 관람은 내게는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조사당에는 의상대사의 얼굴 그림이 있었다고 하나, 워낙 무성의하게 보았던지라 그림이 있었는지, 혹 보았다면 그것이 의상대사인지도 모르겠다. 날이 어둑해졌던 것도 있지만, 날이 추워서 내려와야 했다. 불행하게도 이 날은 삼한사온 중 삼한 기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웠으니 11월 초 날씨치곤 고약했다.

부석사를 내려 오는 길은 한산했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될 곳을 찾았다는 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좋은 여행지는 좋은 책과 닮은 점이 있다.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필요도 없는 경우가 많다. 다시 오고 싶은 여행지라야 한 번의 여행이라도 즐거운 추억으로 장식할 수 있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 '언젠가'는 기약없는 단어이니, '오늘'을 잡아야 한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일지라도 지금 내 손에 들렸을 때 정성으로 읽어야 하고, 또 찾고 싶은 여행지일지라도 지금 내 발로 밟을 때에 가슴과 마음으로 관찰해야 한다. 『부석사』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신경숙 작가도 언젠가 이 곳을 다녀갔겠지. 그리고 2010년 11월에 나도 다녀왔지. 나는 문학상을 수상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 보았던 풍광보다 아름다울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는 듬뿍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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