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나비처럼 훨훨 벚꽃처럼 가볍게

카잔 2013. 4. 23. 16:32

 

"나비처럼 훨훨 벚꽃처럼 가볍게"

-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를 회상하며

 

* 책을 소개하는 대목이 있기는 하나, 내 일상을 담은 글이지 서평은 아님.

 

내 삶이 꿈처럼 흐릿하게 혹은 멍하게 흘러가기 시작한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신이 내게 허락한 삶의 시간을 어떤 일에 주어야 하는지, 이런 먹먹한 질문들이 나를 찾아드는 요즘이네요.

 

대답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방문한 손님을 현관문 앞에 세워 둔 채로 넋 놓고 바라보는 주인처럼 질문을 받아들고만 있습니다. 내 삶은 그렇게 주인의 무위(無爲)로 멈춰서 있네요. 삶은 언제나 자신의 주인을 닮아갑니다.

 

지난 4월 13일부터 제 삶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질병이라는 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츠 슈이치의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를 읽을 때, 연령대별 사망원인으로 40대에서 80대까지는 암이 1위라는 사실, 평생을 살면서 3명 중 1명은 암에 걸린다는 사실, 폐암의 발병률은 4위지만 사망률은 1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경각심을 갖긴 했지만, 암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건 2013년 봄의 일입니다.

 

4월 13일, 글쓰기 수업이 있던 토요일. 나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과 함께 차를 타고 수업 장소를 향하고 있었지요. 우리는 폐암 투병 중이신 구본형 선생님에 대하여, 염려와 희망이 뒤섞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암에 대해 잘 아는 의사가 선생님을 보더니 9개월을 더 사신대.” 암을 ‘잘 아는’ 의사에게 선생님 상황과 사진을 보여 드렸더니 그리 말하더라는 겁니다.

 

반가운 말이었습니다. 9개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 시간만이라도 선생님께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9개월이라도 더 사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 지금보다 고통이 덜하셔서 유작이라도 남기신다면 선생님께도 우리에게도 큰 선물이 될 것 같아. 진정한 삶에 대해 훌륭한 글을 많이 남기신 분이시니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서도 좋은 가르침을 주실 테니까.”

 

정말 그럴 수 있기를! 선생님께서 남은 삶을 조금 덜 고통스럽고 의미 있게 보내실 수 있다면... 이런 생각들을 하는 내 머릿속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였던 장 도미니크 보비가 떠올랐습니다. 1952년에 파리에서 태어난 보비는 1974년부터 기자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1991년에는 <엘르>지의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앞선 정신의 소유자로 자유롭게 살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쳤습니다.

 

1995년 1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보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3주 후에 죽지 않고 깨어났지만,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의식은 정상이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 뿐입니다. 의식은 나비처럼 자유롭지만, 몸은 잠수복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게 지내야 하는 상황이라니요! 잠수복은 그나마 나은 표현입니다. 실은 온 몸에 석고를 부어 깁스를 해 놓은 상황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를 감금한 환자가 된 셈입니다.

 

“노란색 시트 위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손 때문에 고통스럽다. 손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지, 혹은 반대로 너무 차가워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근육이 경직되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기지개를 켜보려 하지만, 내 팔다리는 겨우 몇 밀리미터 정도만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사지의 통증을 더는 데는 이 정도만이라도 충분하다.”

 

보비가 남긴 책 <잠수복과 나비>에 쓰인 글입니다. 말도 못하고, 손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가 책을 쓰게 된 것은 유일하게 움직이는 왼쪽 눈꺼풀과 클로드 망디빌이라는 여성 편집자 덕분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순서대로 쓰인 알파벳 목록(E S A R I N T U L O M D P....)을 클로드가 읽으면, 보비는 원하는 글자에서 왼쪽 눈을 깜빡입니다. 그렇게 알파벳 하나하나에 눈을 깜빡이며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잠수복처럼 갑갑한 몸을 지녔지만 나비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보비의 일상과 꿈 그리고 사색과 유머를 담았습니다. 보비는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온종일 병원에만 있지만, 그는 온 세상을 여행합니다. 그의 아름다운 공상을 읽으며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잠수복이 훨씬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시간 속으로 혹은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닐 수도 있다. 불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다스 왕의 황금 궁전을 거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로 달려가 그 곁에 누워, 그녀의 잠든 얼굴을 어루만질 수도 있다.”

 

보비는 마지막 글에서 캥거루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캥거루는 벽을 넘었습니다.

동물원의 벽을.

하나님 맙소사! 벽이 어찌나 높던지요.

하나님 맙소사! 세상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이 노래는 1996년 7월과 8월, 두 달에 걸쳐 책을 쓰고서 내뱉은 보비 자신의 고백이요 찬탄입니다. 왼쪽 눈을 깜빡이며 글을 쓰기가 어디 쉬웠을까요? <잠수복과 나비>는 절망을 딛고 빚어낸 고귀한 결실입니다. 그 결실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지, 보비는 노래 전후에 이런 글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캥거루의 짧은 노래를 울부짖듯 읊을 수 있다. 언어치료상의 진전을 실감나게 표현한 찬가라고 할 만하다. (중략)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8월의 마지막 주간을 음미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이처럼 편한 기분이었던 적이 없다. 처음으로 나는 휴가 시작과 더불어 휴가 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카운트 다운의 속박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책의 마지막 몇 문장에서 보비는 병실을 관찰합니다. 자신의 눈 깜빡임을 글로 옮겨준 클로드를 묘사하기도 하고, 클로드가 꺼내놓은 지갑 안에 든 호텔방 열쇠, 한 장의 지하철 표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 낯익은 풍경을 대하며, 나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생각에 잠긴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 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강력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1997년 3월 첫째주, 프랑스 전 서점에 <잠수복과 나비>가 깔렸습니다. 보비의 가슴에서 시작된 메시지가 왼쪽 눈을 통해 클로드의 손으로 전달되어 만들어진 책입니다. 보비는 책이 출간되고 며칠이 지난 3월 9일에 ‘그 곳’으로 갔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을 눈으로 보고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과연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며 걱정하던 보비였거든요.

 

2013년 4월 13일, 구본형 선생님도 보비가 말한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암을 잘 아는’ 의사의 9개월을 더 사실 거라는 말을 들었던 바로 그날 밤에 말이죠.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을.

 

구본형 선생님이 아프시던 때, 잠시 뵈었던 날이 떠오릅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아프신 동안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요.” 폐암을 발견하기 전이라 선생님께서 곧 회복할 것으로, 당신도 가족도 나도 생각했을 때 드렸던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10년 동안에는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돌아다니고 싶다.” 장 도미니크 보비도 책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했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보비가 열쇠를 찾았겠지요. 그 곳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끼리도 소통하지 않을까요? 장 도미니크 보비와 구본형 선생님도 서로 만나지 않았을까요? 보비는 잠수복을 벗고 나비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것이고, 선생님도 폐암의 고통을 씻어내고 온 세상을 벚꽃처럼 가볍고 환하게 돌아다니실 테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비처럼 훨훨 벚꽃처럼 가볍게,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