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나의 초상 (7)

카잔 2014. 3. 26. 21:00

 

1.

내 책상 바로 뒤에는 책장이 있다. 앉은 자리에서 뒤로 손을 뻗으면 어느 책이나 뽑아들 수 있는 거리다. 나는 방금 고개를 돌려 가까운 곳에 꽂혔던 세 권의 책을 뽑았다. 자꾸 손이 가지만, 와우를 10기까지 하고서, 유니컨들의 독립을 조금이라도 돕고서 읽을 책들이다. (사실, 한 권 반을 읽었다.)

 

허균의 『한정록』

김원우의 『숨어 사는 즐거움』

이나미 리츠코의 『중국의 은자들』

 

독서를 훗날로 미루려는 까닭은 아직은 숨어 사는 즐거움보다는 함께 사는 의미와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숨어 사는 즐거움은 태어날 때부터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기질을 존중하지만, 기질의 약점을 뛰어넘으며 살고 싶다. 

 

2.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이 말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실천한 작가들이 있긴 하다. 셰익스피어는 후대에 서른 여덟 편의 위대한 희곡을 전했지만, 자신의 생애에 대한 글은 전혀 남겨두지 않았다. 반면 작품 이외에도 수많은 편지와 자서전 그리고 대화들을 남긴 작가도 있다. 괴테는 그를 알 수 있는 문헌이 문학사상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편지라는 단일 문헌으로 치면, 키케로가 선두그룹에 설 것이다. 800여통의 편지가 현대에 전해졌으니까. 그것도 1/3만 전해진 것이란다.)

 

나는 셰익스피어보다는 괴테에 가깝다. 물론 한 개인의 특성도 모순적이고 복합적이라 다른 면에서는 괴테와는 전혀 다를 수 있겠다. 이를 테면, 그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분을 맺고 정치가로서의 삶도 살았지만 나는 그와 다르다. 키케로처럼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글이나 편지를 쓸 때도 많다. 20대 초중반에는 굉장히 많은 양의 편지와 메일을 썼다.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여 보편성을 획득했다면, 몽테뉴는 오직 자신의 내면 세계만을 탐구했다. 몽테뉴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지 않았고 단정하기보다는 관찰함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서술했다. 삶의 불확실성을 한껏 받아들이는 문체로 보편성을 획득했다. 나는 셰익스피어처럼 글을 쓰기보다는 몽테뉴의 방식으로 글을 쓸 때가 더 많다. (3:7의 비율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몽테뉴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최근 일이지만, 인식하기 전에도 나는 그의 방식으로 글을 썼다. 말하자면, <나의 초상> 연재는 이미 450여년 전에 몽테뉴가 전방위적이고도 훌륭하게 해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수상록>을 읽지 않고 있다. 나답게 쓸 데까지 쓰고서 읽기 위해서. 이것이 좋은 방식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읽으면 더욱 풍성해질지도 모르니까. 그저 고집일 뿐이다.

 

3.

나는 나 잘난 맛에 살기 힘든 사람이다. 그러기에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이 민감한 편이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는 편이다. 신경 쓴다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신경이다. 이것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인주의다. 다른 하나는 내가 그들에게 폐가 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신경이다. 이건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는 이타주의다.

 

(내 입으로 내뱉기엔 민망하지만) 나는 후자에 속한다. 항상 나의 행동을 삼가려고 노력한다. 얼마전, 한 독자와 만났을 때의 일이다. 40분의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그녀는 질문을 준비해 왔다. 하나의 질문은 이랬다.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인생철학은 무엇입니까?" 나는 두 가지를 순서를 강조하며 대답했다. "최대한 폐를 덜 끼치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나답게 살자."

 

(가치관을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자신의 실제와는 무관한 바람을 말하곤 하지만, 십년 넘게 자기이해를 공부해 온 나로서는 저것이야말로 나의 바람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나답게 살고 있기에 폐를 덜 끼치는 삶을 추구할 여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원이 전혀 이뤄지지 못한다면, 나는 욕구 불만으로 인해 타인을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리게 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