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참 좋은 말, 진인사 대천명

카잔 2014. 6. 16. 07:07

열흘하고도 이틀 만의 블로그 포스팅이다. 6.4 선거일 즈음부터 어제까지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특히 최근 일주일은 잠도 못자고 일손도 흐지부지했다. 친구의 병세가 깊어진 탓인데, 여느 때보다 일상을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병 문안에 힘쓸 수 있을 테니까. 일주일간 미뤄 온 일부터 챙겨야겠다. 마침 일주일의 시작이다. 지난 주와는 다르게 살자. 지난 주간은 어떠했나?   

 

4일 저녁엔 브라질에서 오신 귀한 손님을 만났다. 3년 만의 만남이고 연배 차가 적지 않는데도 반갑고 정겨웠다. 이번 방한 일정 중 단 한 번의 만남이라는 게 아쉬웠다. 5일엔 친하게 지내는 형님 내외를 만났다. 한참 손아랫사람이라 더욱 예를 다해야 하는데,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했다. 아산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출발했지만 20분이나 늦었다. 병원을 떠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친구 아내로부터 비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일주일째 입원 중이었다. 나는 이틀에 한번씩 면회를 갔다. 헬쓱해져가는 체격과 어두운 빛을 띠는 얼굴을 볼 때마다 눈물을 참아가면서. 하지만 5일날 슬픔이 더해졌다. 면회를 마치고 나서는데, 여느 때처럼 아내가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넌지시 슬픔 어린 소식을 전했다. 병원에서, 이제 오래 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단다. 

 

우는 그녀 앞에서,

그저 묵묵히 듣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7일 토요일. 병원에서 친구와 한 시간 반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꿈 같은 시간이다. 잠깐 컨디션이 좋아서 둘이서 휴게실까지 가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농담도 하고, 삼성 라이온즈 야구 이야기도 하고, 웃긴 동영상도 봤다. 친구에게 웃음을 전하기 위해 배꼽을 잡으며 시청했던 영상을 보여주었더니, 녀석은 밤 11시라 입을 틀어막아가며 웃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다시 저렇게 함께 웃었던 날이 올까? 그날 이후로는 친구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면회 때마다 친구는 마약성 진통제로 인해 약 기운에 취해 있거나 심한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아파하는 친구를 서너 시간 보다가 아내의 아픈 심정 이야기를 듣고 오는 것이 면회의 전부다. 그러다가 드디어 믿기 힘든 현실이 닥쳤다.  

 

6월 9일. 병원에서의 최후 통첩.

 

와우팀원과 미팅을 하던 중 친구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최후 통첩을 보냈어요." 나는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직감했지만 무슨 말이냐고 나는 되물었다. "길어야 한 두달이라고 하네요. 오빠 이제 어떡해요?" 그녀는 울먹였다. 얼른 가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 나니, 눈 앞에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처음 만났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친구 모습부터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 다녔던 수많은 추억들...

 

양해를 구하여 이야기를 정리하고서 병원으로 갔다. 친구는 잠들었고 그녀와 휴게실로 갔다. 사실 자세한 상황을 들을 것도 없었다. 이미 친구의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다. 최초 췌장에서 시작된 암은 간, 복막, 임파선, 대장까지 퍼진 상태고 폐경색도 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간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주치의의 말을 내게 전하던 그녀의 마지막 마디는 물음이었다. "최후 통첩 맞지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틀 후 친구들에게 전할 때에는 '병원에서의 최후 통첩'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통첩은 편지 '牒(첩)'자를 쓰는 한자어로, 문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현실은 절망적이나, 희안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선 여전히 기적을 바랐다. 이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나? 모른다. 현실 거부인지, 마지막 희망인지 정말 모르겠다. 뒤섞여 있을 것이다.

 

병원 측의 최후 통보를 받은 날,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새벽 다섯 시에 잠들었다가 아침 8시에 깼다. 다행히 낮 일정이 연기되어 별 무리 없이 하루를 보냈다. 병원에 갔다. 구미에서 친구 형님이 올라오셨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고, 친구의 투병 생활 이후 더욱 자주 뵙게 된 형님. 이럴 때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친구를 찾았다. 대구에서도 친구 한 명이 면회를 왔다. 그러면서 일주일이 지났다. 11일엔 세 시간 삼십 분 동안 친구 곁에 있었는데, 병실을 나서기 전 10분 남짓,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술술 이어지는 대화가 아니라, 서툰 외국어마냥 드문드문 나눈 말들이었다. 녀석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날 게슴츠레 눈을 뜨고 했던 친구의 잊지 못할 말. 

 

"니 마음 다 안다."  

 

친구의 말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매일같이 면회를 가지만, 고통스러워해서 말도 못 붙이다가 병원을 나서는 원통함을 녀석이 아는 걸까.

 

이것이 지난 일주일 남짓 동안의 일상이었다. 물론 다른 일상도 있었다. 약 4년 만에 만난 선배 형님과의 대화는 진한 인상을 남겼고 앞으로의 내 삶에 변화를 줄 것도 같다. 거칠지만 사랑스러운 후배 녀석과 함께한 정혜윤 PD의 인터뷰 시간도 의미를 건졌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흑백 처리된 일들이고, 병원에서는 일들만 컬러로 남은 느낌이다. 덜 소중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병세가 너무 위중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먼저 떠오른 단어는 근신이었다.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이다. 당분간 친구의 병문안에 집중하고, 혹여나 슬픔이 닥치면 일정 기간 동안 근신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몽주 선생은 명나라 사행을 다녀오는 바닷길에서 조난을 당하여 일행 모두가 죽고 홀로 살아남아 돌아왔다. 그때 일체의 환영인사는 고사하고 백일을 기하여 근신생활을 시작했다.  

 

감정에 휩싸이지 않은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슬픔은 훗날로 미루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유약하고 막연하게 희망하는 일은 지혜가 아니다. 초상이라도 당한 듯 슬픔에 잠기는 역시 지혜가 아니다. 사태를 정확히 판단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진인사 대천명!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대천명) 하지만 그 전에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한다.(진인사)

 

진인사(盡人事)! 나는 이 말이 좋다. 

특히 다한다는 뜻의 한자어, 盡(진)이 마음에 든다.